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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클래식

관현악의 대가 브람스.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2. 16.

흔히 브람스의 음악은 늦가을에 어울린다고들 합니다. 어딘지 모를 우수와 쓸쓸함이 담긴 브람스의 음악이 낙엽 지는 늦가을의 황량함과 비슷하기 때문일 겁니다. 특히 4곡의 교향곡을 비롯한 브람스의 관현악곡의 색채는 우울한 회색조로 가득합니다. 그런 브람스를 ‘관현악 대가’의 반열에 올리는 것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군요. 물론 브람스의 관현악은 바그너의 웅장함과 리스트의 화려함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멘델스존의 경쾌함과 베를리오즈의 참신함과도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브람스의 관현악엔 그 특유의 중후함과 신비함이 배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브람스 관현악의 특별한 점이지요.


음악학자 아담 카스는 브람스의 중후한 관현악 사운드를 가리켜 “두텁고 진흙투성이다”(thick and muddy)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실 것 같군요. 중저음에 무게가 실린 둔탁한 음향은 브람스 음악에 입문하기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브람스의 음악을 처음 들을 때는 그 두터운 음향 덩어리 속에서 의미 있는 멜로디들을 찾아내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도 브람스를 연주할 때면 진흙처럼 엉켜있는 복잡한 성부 구조를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합니다.


 

 

 

중저음에 무게가 실린 어두운 음향

브람스는 결코 대규모 악기편성이나 화려한 음향효과를 노리는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브람스 관현악의 악기편성은 시대착오적입니다. 그의 교향곡 악기편성은 그보다 70여 년 전에 작곡된 베토벤의 교향곡의 악기편성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는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목관악기군에 각각 2대씩의 악기를 넣은 2관 편성을 고수했고 금관악기는 호른 4대와 트럼펫 2대, 트롬본 3대 정도에 머물렀으며 타악기도 대부분 팀파니 한 대에 정도에 그칩니다. 

 

간혹 피콜로와 콘트라바순이 추가되기도 하지만 이런 정도는 베토벤의 교향곡에도 등장합니다. 베를리오즈가 브람스가 첫 교향곡을 작곡하기 46년 전에 작곡한 [환상 교향곡]에서 바순을 무려 4대나 편성하고 하프를 2대 사용했으며 팀파니 주자를 무려 4명이나 투입한 것에 비하면 브람스의 악기편성은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브람스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바그너가 관현악곡에 자주 넣었던 튜바도 거의 쓰지 않았으니, 만일 오케스트라에서 브람스의 교향곡만 연주한다면 튜바가 편성된 교향곡 2번만 빼고 튜바 주자가 내내 쉬어야할 판입니다.


 

우수와 고독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는 브람스.


 

하지만 브람스의 관현악곡은 바그너 못지않은 꽉 찬 음향을 들려줍니다. 자극적이고 압도적인 금관악기가 별로 돋보이지 않는데도 말이죠. 아마도 그 비결은 밀도 높은 ‘화성’에 있는 듯합니다. 브람스는 누구보다도 화성을 잘 다루었던 작곡가입니다. 그는 여러 성부를 중복하고 악기 소리를 조합했으며 그 복잡한 화성이 논리적으로 전개되도록 빈틈없이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케스트라의 각 악기군은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농밀하게 응축된 형태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음향은 항상 용의주도한 화성 전략에 따라 구성되기에 그 특유의 권위와 기품이 있으며 풍부한 울림으로 듣는 이를 압도합니다. 소리 자체는 크지는 않으나 그 밀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거대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밀도 높은 음향과 고뇌에 찬 화성

브람스가 젊은 시절에 작곡하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1번]에도 브람스 특유의 화성과 어두운 음향이 나타납니다. 브람스는 21세 생일을 2달 앞둔 1854년 3월에 그의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의 바탕이 된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d단조]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곧 이 곡의 1악장을 관현악으로 편곡한 후 다시 피아노 협주곡으로 고쳐 1악장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브람스가 존경하던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한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탓인지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의 도입부는 격한 감정과 어두운 분위기로 가득합니다.

 

팀파니의 낮은 D음이 울리는 가운데 강렬한 주제가 연주되지만 그 음향은 어둡고 황량합니다. 끝없이 떠도는 화성적 긴장으로 인해 결의에 찬 주제는 결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무겁게 침잠할 뿐입니다. 25마디에 이르도록 d단조가 확립되지 않고 계속 표류해 나가는 화성은 어떤 면에서는 바그너의 반음계 화성보다도 더욱 격한 갈등을 만들어내며 브람스 특유의 어둡고 중후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어냅니다.


브람스의 관현악은 어둡고 황량한 느낌으로 가득하다.<출처: NGD>


 

no아티스트/연주

  1. 1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번] 1악장 도입부 / 빌헬름 박하우스, 아드리안 볼트, BBC심포니오케스트라, 1932듣기
  2. 2브람스 [교향곡 3번] 1악장 도입부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1949듣기
  3. 3브람스 [교향곡 1번] 4악장 호른-플루트 솔로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1953듣기

 

 

그로부터 거의 30년 후에 작곡된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의 도입부 역시 밀도 높은 음향과 고뇌에 찬 화성으로 깊은 인상을 전해줍니다. 1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F장조의 장 3화음은 한 마디가 지나자마자 감7화음의 고뇌로 뒤바뀌고 다시 장3화음으로 되돌아오며 긍정과 부정을 거듭합니다. 이때 장, 단조의 교대를 주도하는 주요 모티브는 F-Ab-F로 브람스가 청년 시절부터 부르짖던 ‘자유롭게 그러나 즐겁게’(Frei aber Froh)라는 좌우명의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이 모티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현악기의 주제는 강한 포르테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곡의 시작을 알린다기보다는 곡의 마지막을 향해 가듯 끝없이 추락하고 또 추락해가며 브람스 특유의 어둡고 두터운 음향을 들려줍니다.

 

 

 

찬란한 솔로와 섬세한 실내악적 울림


브람스의 관현악은 이처럼 두텁고 어두운 음향으로 채색되어 있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소리도 들려줍니다. 브람스 관현악의 진정한 매력은 그 두터운 음향을 뚫고 나오는 솔로 악기의 특별한 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브람스의 음악을 끈기 있게 듣다보면 그 답답한 음향 덩어리 속에서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숭고하면서도 고귀한 선율이 솟아오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교향곡 1번] 4악장 초반, 오케스트라는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잠하듯 미궁 속에 빠져들지만 갑자기 호른의 시원한 선율이 모든 갈등을 일시에 해결하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줍니다. 그것은 베토벤 교향곡의 찬란한 광명은 아니지만 마치 동쪽 하늘에서 천천히 해가 떠오르듯 서서히 찾아오는 여명과도 같습니다. 그 마법과 같은 순간에는 누구라도 브람스의 관현악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새삼 감탄하게 될 겁니다.


 

브람스는 한 악기를 돋보이게 하는 솔로 용법을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나왔다 하면 다른 어떤 관현악곡에서보다 더욱 빛을 발합니다. [교향곡 2번]에서 2악장의 심오함을 목가적인 풍경으로 바꾸어놓은 3악장의 오보에 솔로와 바이올린협주곡 2악장 도입부에서 독주 바이올린의 등장에 앞서 무려 2분간 계속되는 오보에 솔로, [피아노 협주곡 제2번] 3악장을 여는 첼로 솔로를 듣다 보면 브람스가 악기의 개성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는 악기가 돋보이게 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연주생활을 통해 익힌 실내악적 감각 덕분인 듯합니다.


브람스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관현악곡을 쓰기 시작한 브람스는 본래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습니다. 브람스는 젊은 시절 종종 연주회를 열곤 했지만 그에게 피아노는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악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피아노는 그 자신의 내밀한 음악언어를 담아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연주활동은 화려한 독주보다는 다른 악기와 함께 하는 실내악 분야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브람스 교향곡의 3악장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실내악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은 바로 브람스의 실내악적 감각에서 비롯된 음악이라 하겠습니다. 거대하고 밀도 높은 1, 4악장에 비해 짧은 간주곡처럼 사랑스런 분위기가 가득한 브람스 교향곡 3악장의 음향은 브람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실내악적인 관현악 사운드라 할 만합니다.


 

브람스의 관현악 속에서 솔로악기의 등장은 찬란한 느낌을 안겨주곤 한다. <출처: NGD>


 

 

no아티스트/연주

  1. 1브람스 [교향곡 2번] 3악장 도입부 / 브루노 발터, 베를린 필하모닉, 1950년 듣기
  2. 2브람스 [교향곡 4번] 3악장 도입부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1948년듣기

 

 

말년의 브람스는 [교향곡 제4번]에서 또 한 번의 관현악 실험을 감행하며 여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소리를 창조해냈습니다. 호른의 연주로 시작되는 2악장에서 ‘프리지안’이라는 옛 음계를 사용하는 한편 호른 솔로와 현악기 피치카토 반주가 붙은 클라리넷의 솔로를 통한 색다른 악기 용법으로 거룩한 종교 선언문과 같은 신성한 소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3악장에서 피콜로와 트라이앵글이 강조된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은 브람스로서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브람스는 슈만의 [교향곡 1번 ‘봄’]의 화사한 음향을 닮은 3악장으로 슈만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어떤 지휘자는 “브람스의 음악에선 태양이 빛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브람스 [교향곡 4번]의 3악장만큼은 예외로 해두고 싶군요.


두텁고 밀도 높은 음향으로부터 찬란한 솔로와 섬세한 실내악적 울림에 이르기까지 브람스가 오케스트라로 구현해낸 소리는 결코 단조롭지 않습니다. 그에게 관현악 음향이란 음악을 위한 도구일 뿐 음향효과가 음악에 앞서지 않았습니다. 브람스가 바그너나 베를리오즈 같은 다양하고 화려한 악기편성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관현악법에 서투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브람스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최소한의 악기편성만으로도 그 음향을 구현해낼 수 있었던 진정한 관현악의 대가라 할 만합니다.


 

관련링크 : 통합검색 결과 보기    브람스 음반 더 보기

 

 

 

최은규 / 음악 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음원 제공 소니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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