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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클래식

명 지휘자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2. 16.

지휘란 무엇인가, 지휘자는 어떤 존재일까. 예전 TV 프로그램에서 지휘는 종종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곤 했다. 느린 템포의 음악이 나오면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손을 움직이다가 갑자기 빠른 템포의 음악이 나오면 허겁지겁 손을 휘젓고 땀을 뻘뻘 흘리는 개그맨. 그 몸 개그가 웃음을 자아냈던 이유는 음악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맞춘 안무의 당황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정은 개그와 정 반대다. 음악은 지휘자의 손끝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지휘자의 손끝이 현을 퉁기고 관을 불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래 카오스 상태의 음악은 지휘자의 손끝으로부터 질서를 부여받게 된다. 모든 악단원들이 응시한 마에스트로의 손끝과 표정에서 놀랍도록 생생한 음악이 강물처럼 흘러나오는 것이다.

 

 

 

즉흥연주와 환상성의 결합 - 지휘자 중의 지휘자


사람들이 위대한 지휘자들의 생애와 예술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 중의 한 명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1886~1954)일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반 세기가 지났건만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이 ‘최고의 지휘자’에서 빛을 잃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가 들려준 음악 그 자체에 있었다.

 

나 역시 베토벤 [교향곡 5번](1947), [9번](1951) 브람스 [교향곡 1번](1952), [4번](1948),  슈베르트 [교향곡 9번](1951), 슈만 [교향곡 4번](1953) 등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푸르트뱅글러의 대표적인 음반을 듣고 그 음악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감상했던, 열악한 음질의 방해공작을 넘어 펼쳐진 유장한 드라마는 뇌리에 너무나도 뚜렷하게 각인되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미국 오케스트라 연맹 CEO 헨리 포겔은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휘자를 고르라면 푸르트뱅글러를 고르겠다고 했다. 무엇이 이 지휘자를 그토록 위대하게 만드는가?


푸르트뱅글러의 지휘 모습.

 

그는 음악적 구조와 건축물을 꿰뚫는 명료한 이념으로 즉흥연주와 환상성을 결합하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단지 악보에 충실한 것을 넘어서 연주가 이루어지는 그 시대와 분위기, 모든 것들이 녹아들거나 스파크를 튀기며 갈등하는 양상이 치열하게 연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흘간 같은 곡을 연주해도 모두 다른 연주가 나오는 것이다. 지금껏 그 어떤 지휘자도 푸르트뱅글러만큼의 구조와 환상의 결합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완과 긴장을 통한 신비한 음악 창조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네빌 카두스(Neville Cardus)가 논한 ‘푸르트뱅글러가 다른 지휘자와 구별되는 점’은 흥미롭다. 카두스는 푸르트뱅글러의 해석을 들어보면 음악의 휴지부에서 조차 음악적인 잔영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뜻 불가능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음악적인 침묵은 그 직전 마지막 음표와 그를 따르는 다음 음표의 형성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듣는 이를 침묵 속에 빠뜨렸다가 거기에서 꺼냈다가 하며 침묵을 통해 긴장을 지속시킨 지휘자가 푸르트뱅글러다. 푸르트뱅글러는 그의 관현악 사운드를 근저에서부터 위로 끌어올리는 식으로 축조한다. 더블 베이스와 첼로의 저현을 단단한 화성적 토대로 삼아 다양한 비브라토를 사용함으로써 화소를 분해해내는 듯 풍부한 현의 소노리티(sonority)를 덧댄다.


하지만 푸르트뱅글러의 실제 지휘 모습은 유감스럽게도 그리 멋진 스타일은 아니다. 영상으로 보면 클라이맥스에서 마치 간질 환자가 발작하는 것처럼 허공에서 지휘봉을 떨어댄다. 결코 정확한 비팅이나 멋진 지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서 만들어져 나오는 음악은 무시무시하게 깊고 심오하며 뜨겁고 열정적이다. 그의 지휘는 기본적으로 박자를 센다기보다는 멜로디의 선을 그려나가는 식이었다. 생명을 어루만지는 듯한 그의 지휘는 살아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다시 이완과 긴장을 반복해서 심장이 뛰는 음악, 자연의 움직임과 같은 생생한 연주를 끌어냈다. 연주가 너무 규칙적이고 매끄러우면 기계적으로 느껴진다. 폭포와 인공폭포의 차이는 그 불규칙성에 있다. 곳곳의 작은 돌에 부딪쳐서 우회하는 물의 흐름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의 지휘가 그냥 자연의 생명력으로만 향해 나아갔던 건 아니었다. 푸르트뱅글러에게는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가 드리워져 있었다. 템포 변환의 신비로움이라든지 작품의 영적인 본체를 찾아내는 영감과 마법이 그의 지휘에는 어른거렸다.

 

 

 

베를린 필을 지휘하며 음악계의 ‘황제’로 등극하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1886년 고고학자이며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아돌프 푸르트뱅글러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전통 게르만 혈통을 물려받은 푸르트뱅글러의 풍부한 교양은 훌륭한 학자나 예술가를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받은 어린 시절의 교육에 기인한다. 이는 당시 유복한 독일 집안의 전통이었다. 아버지는 고고학 여행 때 아들을 데리고 다녔고,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 유적의 위대함을 현지에서 직접 체험 학습했다. 획일적인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힌 적인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은 다양한 철학과 예술을 아우르며 너른 지평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한 준비기간이었다.

 

처음에는 작곡을 공부했던 푸르트뱅글러는 1905년부터 브레슬라우, 뮌헨 등지에서 견습 지휘자로 경험을 쌓았다. 푸르트뱅글러가 지휘대 위에 공식 데뷔한 것은 1906년 6월이었다. 당시 푸르트뱅글러가 뮌헨 카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과 자작곡 [교향곡 1번] 중 아다지오, 메인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이었다. 1911년에 뤼벡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된 푸르트뱅글러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915년 만하임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인정받고 1920년 베를린 국립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한 끝에 36세이던 1922년 지휘자 아르투어 니키쉬에게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물려받았다.


피아노를 연주 중인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푸르트뱅글러의 모습.
<출처: wikipedia>

 

푸르트뱅글러의 명성은 40대가 되기 전에 세계에 알려졌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뉴욕 필에 초청돼서 미국에서 활동했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빈 필 겸 빈 국립오페라 상임 지휘자에 임명됐다. 거기에다 바이로이트 음악제 총감독까지 석권한 푸르트뱅글러는 명실공히 음악계의 ‘황제’로 등극한다.

 

이후 나치 통치 하의 독일에서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의 부당한 예술 간섭에 맞섰고 유태계 음악가들의 도피를 도왔다. 유태인 음악가 힌데미트가 나치 문화행정 담당자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했을 때 푸르트뱅글러가 이에 반대해 힌데미트를 옹호한 이른바 ‘힌데미트 사건’은 유명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에 협조한 혐의로 전범으로 몰려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47년 무죄 판결로 복권되어 다시 베를린 필의 무대로 돌아왔다. 1952년 바이로이트 부활 연주회를 지휘했고 같은 해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가 됐지만 1954년 사망과 함께 음악계 제왕의 대권은 카라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사교적이지 못하고 세상사에 어눌했던 예술가


한 인간으로서 푸르트뱅글러는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베를린 필 첼로 수석이었던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는 푸르트뱅글러가 “명예욕과 질투심이 강하고 고상하게 보이기를 좋아했다. 비겁자이면서도 영웅적이었고, 강하면서도 약했고,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박식했다. 독일적이면서 세계적이었고 음악에 있어서만은 조화가 잘 잡혀있고 대범했다”고 술회했다. 실제로 푸르트뱅글러는 젊고 승승장구하는 카라얀을 질투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라얀을 방해했다고 한다. 또 꽤나 멋쟁이였지만 나사가 한두 개 풀린 사람처럼 셔츠의 단추를 잘못 끼우고 리허설에 임하는 일이 많아 단원들의 웃음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소프라노 마리아 슈타더는 푸르트뱅글러를 “세상사에 어두운 얼간이”라 불렀다 하는데, 그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지 못한, 정치적인 술수가 얕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악마나 독사 같은 나치와 교류했으니 얼마나 이용당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1945년 베를린에서 콘서트를 지휘 중인 푸르트뱅글러. <출처: Deutsches Bundesarchiv.wikipedia>

 

 

동시대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뱅글러에 대해 ‘아마추어’라고 말했다. 얕잡아본 표현이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프로로서 지휘와 소통의 기술, 즉 연습의 분배라든지 악단원들의 배려를 통한 전략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치 대학 오케스트라가 1년에 한 번뿐인 교향악 축제에서 연주하듯 매번 연주의 리허설에 불타오르듯 임했고, 연습시간 배분을 잘 못해 마무리를 잘 못하고 본 연주회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음반 녹음에서도 부분 수정에 익숙지 못해, NG가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연주했다. 사교적이지 못했고 어눌했지만, 베를린 필뿐만 아니라 그가 지휘하는 모든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푸르트뱅글러를 마음 속 깊숙이 존경했다고 한다. 베를린 필 단원의 회고에 의하면 어느날 자기들끼리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음색이 달라지고 음악이 생기를 띠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푸르트뱅글러가 연습장 한 켠에 서  있었다고 한다. 단지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사람. 진짜 지휘자는 그런 것이다. 이후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가 카라얀으로 바뀌고 미국으로 첫 연주여행을 떠났을 때 많은 단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표음반
푸르트뱅글러가 남긴 대표적 음반을 살펴보면 그의 레퍼토리는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바그너, 브루크너 등 정통 독일 고전 낭만 음악에 치중해 있다. 그 중에서도 베토벤은 특별하다. 베를린 필과 빈 필을 번갈아 지휘한 그의 베토벤 연주 기록을 보면 2번, 8번은 음질이 안 좋은 1948년 실황이 남아 있다. 하지만 장점이 단점보다 훨씬 많고 특히 1,3,4,5,7번은 뛰어난 연주다. 6번 ‘전원’은 좀 다른데, 느린 템포에 호불호가 갈릴 연주다. 9번 ‘합창’은 전설적인 195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재개관 실황 녹음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녹음이 EMI 프로듀서 월터 레그가 리허설과 실황을 짜깁기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면서 최근에 그날의 실황을 온전히 간직한 바이에른 방송국의 녹음(오르페오 레이블)이 발매되기도 했다.

 

 

약력
1906  뮌헨 카임 관현악단 지휘로 데뷔
1922  베를린 필하모닉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1927  빈 필 & 빈 국립오페라 상임 지휘자
1931  바이로이트 음악제 음악총감독
1933  베를린 국립 가극장 수석지휘자
1952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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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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