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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클래식

관현악의 대가 리스트.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2. 16.

프란츠 리스트의 이름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단지 피아노 음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리스트는 ‘교향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해 관현악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혁신주의자였습니다. 리스트는 19세기 중반의 독일 관현악이 지극히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교향곡’이라는 옛 형식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교향시’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하게 된 것이지요.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말은 ‘교향곡’(symphony)과 ‘시’(poem)의 합성어로, 교향시란 결국 ‘시적인 교향곡’인 셈입니다. 리스트는 교향시를 통해 ‘시적인 것’, 혹은 ‘문학적인 이야기’를 오케스트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오케스트라로 문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거나 암시하기 위해선 더욱 다채로운 음향이 요구됩니다. 그 때문인지 리스트의 교향시들을 들어보면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처럼 드라마틱한 표현과 화려한 음향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관현악곡에선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에서는 그다지 자주 들을 수 없는 심벌즈나 종, 트라이앵글 등 타악기의 음향효과가 깊은 인상을 주곤 합니다. 또 트롬본과 튜바 등 저음 금관악기를 동원한 힘차고 어두운 음색은 리스트 특유의 악마적인 관현악 음향을 만들어내서 듣는 이들에게 압도하기도 합니다.

 

 

 

드라마틱한 표현, 화려한 음향이 가득한 관현악


리스트는 그 특유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개발해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관현악 기법을 갈고 닦았습니다. 언제나 ‘피아노’를 작곡의 출발점으로 삼곤 했던 그는 본격적으로 교향시를 작곡하기 전에 먼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들을 작곡하면서 서서히 관현악에 숙달해갔습니다.


 

리스트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해 쓴 작품의 대부분은 그가 연주 여행을 다니던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그 작품들은 대개 여러 번의 수정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리스트가 자신의 관현악 기법에 완전한 자신을 갖지 못했던 탓도 있습니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의 작곡 과정을 보면 리스트가 한 작품을 완벽하게 다듬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리스트는 1830년에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작곡하기 시작해 1839년에 작품 초안을 마무리했지만 1849년이 되어서야 요아힘 라프의 도움으로 오케스트레이션까지 모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협주곡을 완성한 후에도 1853년과 18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작품을 손보며 개정을 거듭했습니다.


여러 번의 개정 작업으로 더욱 훌륭하게 다듬어진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에는 리스트의 관현악에 종종 등장하는 타악기의 효과적인 용법이 나타나서 인상적입니다.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진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3악장은 트라이앵글의 인상적인 솔로로 시작해서 매우 독특한 인상을 줍니다. 그 때문에 당대의 보수적인 음악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곡에 트라이앵글을 사용한 것을 비난하면서 이 작품을 ‘트라이앵글 콘체르토’라 명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별명은 타악기의 독특한 음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리스트 관현악의 특징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 <출처: wikipedia>


 

1848년에 바이마르 공작의 궁정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리스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면서 관현악 작곡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관현악 기법에 더욱 자신감을 얻은 그는 파우스트의 전설에 영감을 받은 [파우스트 교향곡](1854년 작곡, 1857년 개정)과 단테의 [신곡]에 영감을 받은 [단테 교향곡](1856년),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파우스트」에 의한 두 가지 에피소드](1859-61),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회화 등에서 영향을 받은 10여곡의 교향시 등 그의 대표적인 관현악곡들을 쏟아냈습니다.

 

 

 

어둡고 극적인 색채 – 악마주의 음악


리스트의 교향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은 단연 [전주곡](1848년 작곡, 1854년 개정)이라 할 만 합니다. 이 곡은 본래 리스트의 합창곡 [4원소]의 전주곡으로 작곡되었지만 출판은 되지 않았습니다. 리스트는 이 전주곡을 하나의 독립된 교향시로 출판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어울리는 문학적 표제를 찾다가 라마르틴의 시적 명상록 [전주곡](1820)에서 찾아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단지 죽을 때 처음 울리는 엄숙한 소리로 된 미지의 노래를 위한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리스트는 악보에 이와 같은 유명한 서문을 써넣어 자신의 표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삶을 죽음의 전주곡에 비유한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no아티스트/연주

  1. 1리스트 [전주곡] '젊음' /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 1954듣기
  2. 2리스트 [전주곡] '갈등' /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오케스트라, 1954듣기
  3. 3악마주의 - [메피스토 왈츠] 1번 / 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오케스트라, 1955듣기

 

 

 

리스트의 음악 역시 죽음의 전주곡인 인간의 삶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그려냈습니다. ‘젊음과 사랑’, ‘문제와 갈등’ ‘목가적인 즐거움’ ‘투쟁과 승리’가 그것이지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이 곡이 마치 한 사람의 자서전처럼 느껴집니다. 리스트의 [전주곡]이 시작되면 느린 서주 후에 힘찬 음악이 연주됩니다. 금관악기들이 멋진 주제를 연주하면 현악기들의 반주음형이 치솟아 오르며 분위기를 돋우고, 여기에 팀파니가 가세해 힘을 더합니다. 자신감에 넘치는 젊음의 에너지가 음악 속에 약동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리스트는 인간의 갈등과 복잡한 문제를 반음계적인 선율과 각진 리듬, 그리고 금관악기의 강한 울림으로 표현하며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리스트의 [전주곡]에서 인간의 갈등을 표현한 음악에서 들을 수 있듯이 리스트의 관현악곡은 그 특유의 어둡고 극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리스트의 음악은 때때로 ‘악마주의 음악’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반음계적 화성과 적절한 장식음 용법에 나타나는 리스트의 ‘악마주의’는 [메피스토 왈츠 제1번]에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곡은 피아노 독주곡으로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관현악으로 듣는 [메피스토 왈츠]는 더욱 화려하고 현란한 음향을 뿜어내고 있어 악마적인 느낌이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이 곡은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파우스트」에 의한 두 가지 에피소드](1859-61)중 두 번째 부분에 해당되고 다음과 같은 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쾌락을 찾아 선술집에 들어선다. 농군들이 춤을 추고, 메피스토펠레스가 바이올린을 빼앗아 연주하여 사람들의 넋을 잃게 만든다. 그들은 온통 구애에 정신을 쏟으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별빛 가득한 밤 속으로 빠져나간다. 파우스트는 소녀들 중 한 사람을 뒤쫓아 간다. 이때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린다.”


죽음과 삶의 투쟁, 불가분의 관계를 그린 [전주곡]. <출처: wikipedia>


 

리스트의 음악은 시의 내용과 무척 잘 어울립니다. 특히 메피스토펠레스가 바이올린을 빼앗아 연주하는 장면에선 마치 바이올린을 조율하는 듯 거친 소리가 들립니다.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이 장면에서 손가락으로 현을 짚지 않고 완전히 놓아버린 상태에서 ‘개방현’으로 연주합니다. 바이올린 개방현 특유의 쨍쨍 울리는 소리는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합니다.

 

 

 

표제가 있는 변형된 교향곡


리스트는 ‘교향시’를 창안해 많은 교향시를 작곡했지만 ‘교향곡’ 분야에도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의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처럼 표제가 있는 변형된 교향곡이라 할 만합니다. 그 대표작인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은 마치 서로 다른 표제를 지닌 3개의 교향시를 묶은 형태처럼 보입니다. 이 곡은 전체 3악장으로 이루어졌지만 각 악장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파우스트와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를 나타내기 때문이지요.


 

리스트는 [파우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인 파우스트와 그를 사랑하는 그레트헨, 그리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빼앗은 메피스토펠레스를 각각 교향곡의 1, 2, 3악장으로 묘사하면서 세 사람의 초상을 음악적으로 그려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1악장에 나타난 파우스트의 주제와 3악장의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를 같은 선율을 바탕으로 작곡해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같은 영혼의 서로 다른 측면일 뿐이라는 독특한 사상을 드러냈습니다. 1악장이 시작되자마자 들려오는 파우스트의 주제는 상당히 난해하고 심오하게 들립니다. 증3화음의 펼쳐놓은 이 선율은 어렵고 난해한 학문의 세계를 탐험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려내는 듯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를 그린 3악장에서 이 주제는 왜곡되고 비틀립니다. 고뇌하는 지성인으로 표현된 파우스트의 주제는 현을 퉁기는 피치카토와 기괴한 반음계,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장식음으로 괴상하게 변모합니다. 한순간에 파우스트의 모든 노력이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듯합니다. 반면 순수한 여인 그레트헨을 묘사한 2악장에선 아름다운 그레트헨의 때 묻지 않은 성품이 오보에와 비올라의 이중주로 표현됩니다. 오보에의 선율을 비올라가 반주한다는 독특한 발상은 매우 소박한 음향을 만들어내며 그레트헨의 순진무구함을 더할 나위 없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우스트 박사와 그의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 <출처: wikipedia>


 

 

no아티스트/연주

  1. 1파우스트 고뇌 테마 / 토마스 비첨 경,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58듣기
  2. 2메피스토 고뇌 테마 / 토마스 비첨 경,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58듣기
  3. 3그레트헨 오보에 / 토마스 비첨 경,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58듣기

 

 

 

 

시적인 의도, 문학적인 내용


리스트의 관현악 기법은 어딘지 바그너의 관현악곡과 닮은 데가 많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에서처럼 금관악기가 주선율을 연주하는 사이 현악기가 복잡한 장식음형을 연주하기도 하고, 현악기들이 여러 성부로 갈라져 두터운 층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스트는 여기에 종소리나 심벌즈의 타격을 살짝 곁들여 그 특유의 화려한 색채감을 더했고, 현악기와 목관악기, 금관악기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별된 깔끔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명확한 울림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엇보다 리스트에겐 음악작품 속에 담긴 시적인 의도나 문학적인 내용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리스트의 악보에는 다른 작곡가들의 악보에선 별로 등장하지 않은 특이한 악상 지시어가 눈길을 끄는데, 간혹 그 지시어가 상당히 세심하고 문학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파우스트 교향곡] 2악장 서두의 악상 지시어 중 ‘soave’(온화하게)나 3악장 서두의 ‘ironico’(반어의, 비웃듯이)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리스트의 악보에서 독특한 악상 지시어를 발견할 때마다 리스트가 음악 속에 담고자 했던 시적인 아이디어를 좀 더 섬세하게 느끼고 음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리스트는 피아노음악 작곡가로 인식되는 탓인지 그의 관현악곡은 그의 피아노곡에 비해 크게 주목받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리스트의 관현악곡 중 오늘날 무대에 오르는 작품으로는 리스트의 제자 도플러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헝가리 광시곡 2번]이나 교향시 [전주곡] 정도입니다. 리스트의 관현악곡이 있었기에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그토록 파격적이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리스트의 다양한 교향시들이 잊히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앞으로 리스트의 여러 관현악곡들을 콘서트홀에서 좀 더 자주 듣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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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규 / 음악 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음원 제공 소니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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