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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클래식

관현악의 대가 바그너.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2. 16.

만일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바그너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뭐라 답할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싫어한다고 말할 것 같군요. 바그너 음악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다른 곡을 연주할 때보다 몇 배의 중노동을 해야 하니까요. 평소에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던 바이올리니스트라 해도 막상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하며 고생한 후에는 바그너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지도 모릅니다. “바그너는 바이올린에 대해 알기는 아는 걸까? 대체 제1바이올린을 뭘로 아는 거야?” 가장 중요한 선율을 연주하는 데 익숙한 제1바이올린 주자라면 바그너에게 이렇게 화를 낼 지도 모르겠군요.


 

 

 

현악기를 배경의 음향효과로 활용

그 유명한 [탄호이저] 서곡 뒷부분에서 관악기들이 웅장하고 멋진 순례자의 테마를 연주하는 동안,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눈이 빠지도록 악보를 들여다보며 계속되는 16분 음표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연주해야 합니다. 이 때 반음과 온음을 오가는 그 미묘한 음계 중 단 하나의 음표도 빠뜨리지 않고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연주불능’이라며 포기하는 이들도 상당수 될 것 같군요.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힘든 중노동을 하는 사이 관악기의 주제가 현악기의 효과음향이 어우러져 오케스트라가 놀랄 만큼 매혹적인 소리가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들도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중노동은 이토록 멋진 음악을 만들기 위한 ‘숭고한 희생’(!)인 셈이니까요.


현악기를 마치 배경 음향효과로 사용하는 방식은 바그너가 그의 음악에 사용했던 여러 기법 중 하나입니다.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선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점이죠. 그래서 1855년 3월 20일자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에 실린 비평문에도 [탄호이저] 서곡 마지막 부분의 바이올린 연주를 가리켜 “웅성거리는 바람”이라 칭하면서 이 부분이 “작곡가가 의도한 생동감과 인류의 행복을 표현하기에는 연주자들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불편하게 한다”며 연주 상의 어려움을 꼬집어 비판했습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창조해낸 작곡가 바그너. <출처: NGD>


 

no아티스트/연주

  1. 1‘탄호이저’ 중 서곡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 1952듣기

 

 

 

비록 현악기 주자들에게는 연주상의 불편함을 안겨주긴 하지만 이 부분의 음악적인 효과는 대단합니다. 웅성거리는 바람소리 같은 현악기 연주가 순례자의 테마를 더욱 멋지고 대단해 보이게 하거든요. 이처럼 금관악기가 하나의 선율을 유니즌(unison, 둘 이상의 악기들이 동시에 같은 선율을 중복하는 기법)으로 연주하며 위엄을 과시하는 동안 현악기들이 빠른 16분 음표로 장엄한 금관의 총주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바그너가 자주 쓰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이는 소위 ‘바그너 사운드’의 비결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풍성한 목관악기, 막강한 금관악기


바그너 사운드는 마약과 같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 소리가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호른과 트롬본 등 금관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음향 때문일 겁니다. 바그너 음악에서 금관악기는 최절정의 순간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관악기는 그의 음악작품 전체를 통해 중심적인 음색을 결정합니다. 마치 수천 명의 성악가들이 소리 높여 합창하듯 금관악기들이 소리를 모아 힘차게 연주하면 현악기의 여러 가지 장식음과 펼친 화음으로 분위기를 돋우며 금관악기의 멜로디를 놀랄 만큼 강력하고 눈부시게 장식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학자 토비는 바그너 특유의 소리를 가리켜 “두터운 띠”와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바그너의 총보를 보아도 여러 단에 걸쳐 분포된 음표들이 두터운 띠와 같이 느껴집니다. 관악기의 수가 많기에 그 띠는 더욱 두텁게 느껴집니다.


 

트럼펫과 오보에 – 바그너 사운드에서 금관, 목관악기는 큰 역할을 담당한다. <출처: NGD>

 

 

바그너는 플루트와 오보에 등 목관악기의 각 섹션마다 3~4대씩의 악기를 편성하곤 했습니다. 브람스를 비롯한 많은 독일 작곡가들이 그보다 전 시대를 살았던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목관악기의 각 섹션에 2대씩 편성하는 ‘2관 편성’에 머물렀던 것을 생각해보면 꽤 많은 수입니다. 무엇보다 목관악기 편성이 3관 이상이 되면 목관악기들은 3화음을 이루는 세 개의 음을 모두 채워 연주할 수 있게 되어 화성적으로도 유리합니다. 아마도 바그너 사운드가 그토록 꽉 차고 충실하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군요.


금관악기 그룹은 더 막강합니다. 바그너는 금관악기 그룹에 무려 8대의 호른을 배치했고 3~4대 정도의 트럼펫을 편성해  금관악기 소리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또 [니벨룽의 반지]에선 ‘바그너 튜바’라는 악기를 사용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호른과 튜바의 중간 정도의 음색을 지닌 바그너 튜바는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그룹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니벨룽의 반지]에서  목관악기군 하나만 살펴보아도 무려 7옥타브에 걸친 32개의 성부로 분할되어있고 금관악기 현악기 역시 여러 성부로 갈라져 매우 두터운 음향 층을 형성합니다.  겹겹이 쌓인 음표들은 어마어마한 소리 덩어리를 만들어내며 풍요로운 음향을 뿜어내는 동안 듣는 이들은 신비로운 황홀경에 빠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신만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창조하다


이처럼 독특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창조해낸 바그너가 정작 악기 연주에는 서툴렀다는 건 의외입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위대한 작곡가들의 대부분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반면 바그너의 피아노 연주 실력을 그리 훌륭하지 않았고 그 밖의 다른 악기의 연주 수준은 더 형편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특정 악기에 숙달하지 못한 바그너는 선입견 없이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리스트를 비롯한 피아니스트 작곡가들은 피아노를 작은 오케스트라로 간주해 피아노로부터 관현악으로 접근해가는 방식으로 관현악곡을 작곡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방식은 자칫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여러 악기들의 개성을 간과할 위험이 있습니다. 관현악곡을 마치 ‘피아노곡의 확장’ 쯤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저지르기 쉽지요. 바그너는 비록 피아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잘 다루지는 못했지만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여러 악기들의 조합이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를 확실하게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오케스트라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바그너는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역할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뒤집고 자신만의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만들어냈습니다. 주선율을 연주해야할 제1바이올린이 빠른 장식음형을 연주하며 금관악기 선율을 장식하는가 하면, 선율악기인 현악기들이 마치 화음을 연주하는 화음악기인양 3화음의 구성 음들을 펼친 화음으로 연주하며 화성을 강화하기도 하고, 금관악기는 시종일관 주도권을 잡고 바그너 사운드의 뼈대를 형성합니다. [로엔그린] 3막 전주곡에서처럼 가장 중요한 멜로디를 금관악기들이 연주하는 일도 많지요.


바그너의 요란한 오케스트라 음향을 풍자한 삽화 <출처: wkipedia>


 

 

no아티스트/연주

  1. 1‘로엔그린’ 중 3막 전주곡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NBC 심포니오케스트라, 1952년듣기
  2. 2‘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전주곡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1954년듣기

 

 

 

저음 악기 첼로도 전면에 등장해 중요한 멜로디를 종종 연주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에서도 고요한 침묵 중에 운을 떼는 악기는 첼로입니다. 동경하듯 애타는 그리움이 배어있는 첼로의 연주에 화답하는 목관악기들의 연주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갈망을 드러내며 불안한 여운을 남깁니다. 바그너의 음악 속의 비올라 역시 특별합니다. 여기서 비올라는 결코 화음을 채우는 특징 없는 악기가 아닙니다. 특히 [탄호이저]의 베누스베르크(비너스의 동산)를 묘사한 부분에서 두 옥타브에 걸쳐 빠른 템포로 꿈틀대며 솟아오르는 비올라의 선율은 비너스의 관능적 욕망을 닮았습니다. 비올라 특유의 그 독특한 콧소리가 아니라면 이런 특별한 느낌을 살려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음악의 흐름을 주도하는 오케스트라


이처럼 바그너의 오페라 속에선 오케스트라의 여러 악기들이 성악가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일찍이 바그너는 ‘베토벤 순례지’에 쓴 글에서도 “오케스트라는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심연을 재현해야한다”라며 오케스트라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의 작품을 들어보면 관현악이 표현해내는 감정의 깊이는 성악을 능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바그너의 작품 전체가 대규모 교향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악가는 마치 오케스트라에 속한 하나의 악기처럼 느껴지고 음악의 흐름은 오케스트라가 주도하고 있기에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성악 성부를 빼고 오케스트라만 연주하더라도 그 느낌은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을 성악 없이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바그너는 여러 저서를 통해 기악과 가사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종합예술작품의 중요성을 역설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음악극에선 기악만으로도 극적인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바그너의 뛰어난 관현악적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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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규 / 음악 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음원 제공 소니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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