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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클래식

관현악의 대가 베를리오즈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2. 16.

 

관현악의 역사에 있어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이름은 ‘혁명가’로 통합니다. 그가 없었다면 바그너와 말러의 화려한 관현악 작품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관현악법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그의 혁신적인 관현악곡들은 상상을 초월한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냈기에 당대는 물론 지금 들어도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관현악의 혁명가는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바람에 당대 청중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평생 경제적인 어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오늘날에 위대한 관현악의 대가 베를리오즈의 작품들 가운데 단지 [환상 교향곡] 등 몇 곡만 연주된다는 건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관현악의 혁명가 베를리오즈


사실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수의 연주자들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무대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베를리오즈의 작품 중에는 대규모 합창과 트롬본 6대와 하프가 12대가 필요한 것도 있으며, 대 편성 오케스트라 외에도 별도의 금관 오케스트라 4개를 사방에 배치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합창과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필요도 하는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은 그 어느 음악작품들보다 ‘비싼’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공연이 성공한다 해도 이익을 남기기는 커녕 적자를 피할 수 없지요. 그래서 오늘날에도 베를리오즈의 대규모 작품들을 연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일단 무대에 오른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그 독특한 음향과 끓어오르는 열정,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로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베를리오즈가 어릴 때부터 틀에 박힌 음악교육을 받았다면 그토록 기발한 관현악곡을 작곡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프랑스 리옹 교외의 라 코트 생탕드레에서 의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베를리오즈는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열정적인 기질을 보였습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음악과 문학에 강하게 끌렸지만 주변에 제대로 된 음악교육기관이 없었고 그가 살던 시골 마을엔 피아노도 없었기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습니다. 피아노 대신 플루트와 기타 연주를 배우고 작곡 공부도 독학으로 한 베를리오즈는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갔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과 예술가적 기질을 억누를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도 의학보다는 오페라에 더 빠져들었지요. 베를리오즈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 음악원에서 뒤늦게 작곡을 배우며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파리에서 그가 평생 흠모하게 될 두 사람의 영웅을 발견합니다. 바로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이지요.


“위대한 베토벤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는 음악이라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목표를 깨달았지. 하지만 그의 음악보다 더 새롭고 훌륭한 음악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네. 그는 이미 음악이라는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에 다다랐거든. 하지만 베토벤과는 다른 방향도 있을 거야.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 새롭게 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반드시 해내고 말겠어.”


 

새로운 아이디어로 관혁악법의 혁명을 일으킨 작곡가 베를리오즈. <출처: wikipedia>


 

1829년 1월 11일 베를리오즈가 그의 친구 에드워드 로셰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베토벤을 향한 존경심과 더불어 그를 능가하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려는 베를리오즈의 야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해보지 못한 음악,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참신한 음악. 그것이 바로 베를리오즈가 꿈꾸던 음악의 혁명이었습니다.

 

 

 

극한의 상상력으로 탄생한 음향의 판타지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꿈꾸던 음악을 실현해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했습니다. 고정관념이 없었던 그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음향의 판타지를 실제 관현악곡에 옮겨놓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팀파니나 큰북 등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악기지만 전통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베를리오즈는 팀파니에도 음높이가 있으니 수십 대의 팀파니를 한꺼번에 연주하면 화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습니다. 수십 대의 팀파니로 만든 화음이라니! 21세기가 된 지금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또 같은 제1바이올린 섹션이라도 그것을 몇 개의 성부로 더 세분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낮은 음을 내는 더블베이스 섹션도 얼마든지 여러 성부로 분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탄생한 괴물 같은 작품이 바로 [레퀴엠](죽은 자를 위한 미사)이었습니다.


 

가톨릭 교육을 받긴 했으나 신앙이 없었던 베를리오즈에게 [레퀴엠] 같은 종교음악은 신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 음악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종말과 부활에 대한 환상을 압도적인 음향으로 표출해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베를리오즈는 [레퀴엠]에서 죽음과 심판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오케스트라의 사이즈를 어마어마하게 늘려 놓았습니다. 이 곡에서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만도 당시에는 비교적 많은 수인 25명 이상이나 요구했고 비올라와 첼로도 20명 이상, 더블베이스도 최소한 1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악보에 명시했습니다. 목관악기는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의 각 악기 군에 4대씩의 악기를 배치한 4관 편성에다 바순은 8대로 그 수를 대폭 늘리고, 호른은 무려 12대, 튜바는 4대나 요구했습니다.


오늘날 웬만한 관현악곡에 튜바가 한 대 정도 필요한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편성이지요. 게다가 타악기는 8쌍의 팀파니를 연주할 주자 외에도 9명이 더 필요하고, 그리고 최소 200여 명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테너 독창자까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각각 8~10대 정도의 금관악기로 구성된 소규모 오케스트라 4개가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입체적인 음향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베를리오즈의 대규모 편성을 풍자하는 캐리커쳐. <출처: wikipedia>


 

베를리오즈가 이토록 엄청난 편성의 작품을 작곡한 것은 당시 연주 장소의 여건이 갖추어졌던 탓도 있습니다. 1837년에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이 연주된 안바리드 예배당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장소였고 베를리오즈의 혁신적인 악기 편성의 효과가 잘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1830년 7월 혁명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작곡된 이 대규모 레퀴엠 중에서도 제6곡 ‘눈물의 날’(Lacrymosa)에는 특히 4개의 금관 앙상블과 8쌍의 팀파니, 심벌즈 등이 활약하고 있어, 화려한 색채를 만들어냅니다.


 

no아티스트/연주

  1. 1[레퀴엠] - 눈물의 날 / 샤를 뮌쉬,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 잉글랜드 콘서바토리 합창단, 1959듣기

 

 

 

베를리오즈의 또 다른 주요 종교음악인 [테 데움](신이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또한 만만치 않은 악기 편성을 자랑합니다. 역시 4관 편성 목관악기에 트롬본이 6대나 나오고, 트럼펫과 코넷을 합쳐 4대가 등장하며, 2대의 튜바와 여러 명의 타악기 주자들이 필요할 뿐 아니라 하프는 무려 12대가 나옵니다. 이토록 비정상적인 관현악 편성으로 인해 베를리오즈는 종종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반감을 사곤 했습니다. 그의 편성대로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악기를 더 구해야할 뿐 아니라 객원 연주자들을 불러 연습 스케줄도 조정해야하고 음악회를 열기 위한 비용도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이런 반발에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작곡가들이 잉글리시 혼이나 하프 등의 특수 악기들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상식을 뒤엎는 성부 분할과 두터운 음향 층


베를리오즈 관현악곡의 혁신적인 면은 단지 악기 편성의 다양성과 거대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사용하는 방식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각 악기군의 성부를 더 세부적으로 분할해 여러 가지 음향 층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기법은 그의 대표작 [환상 교향곡]에 잘 드러납니다. 마녀들의 축제를 묘사한 5악장의 도입부의 현악기군을 보면 다른 작곡가들의 총보에서는 보기 힘든 성부 분할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은 각각 세 파트로 나뉘고, 비올라는 두 파트로 분할되고 있어 통상 5성부로 나뉘는 현악기군의 성부는 무려 10성부로 분할되어 두터운 음향 층을 형성합니다. 상식을 뒤엎는 성부 분할 기법으로 인해 [환상 교향곡] 5악장의 도입부에는 한밤중의 스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나타냅니다.


 

 

no아티스트/연주

  1. 1[환상 교향곡] 5악장 도입 / 앙드레 클뤼탕스, 프랑스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 1955듣기
  2. 2[환상 교향곡] 5악장 - 콜레뇨듣기
  3. 3[환상 교향곡] 5악장 - E플랫 클라리넷듣기

 

 

 

이 부분의 악보를 보면 베를리오즈가 현악기군을 단지 일관성을 지닌 하나의 그룹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현악기군은 아주 작은 그룹들의 총합이며 여러 가지 조합을 통해 다채로운 음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동적인 조직인 듯 느껴집니다. 이런 발상은 이 곡이 작곡된 1830년 당시에 그 어느 작곡가도 생각해내기 어려운 파격적인 관현악법입니다.


 

베를리오즈의 혁신적인 관현악법 덕분에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다른 관현악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상한 주법들을 구사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악 주자들은 잦은 트레몰로(tremolo, 한 음을 빠르게 반복하는 주법)와 아르페지오(arpeggio, 펼친 화음)뿐 아니라, 두 줄을 한꺼번에 긋는 이중음이나 현을 손으로 퉁기는 ‘피치카토’(pizzicato), 약음기를 끼고 연주하는 ‘콘 소르디노’(con sordino) 등의 다양한 주법을 능숙하게 구사해야 합니다. 게다가 실제 작품에서 거의 보기 어려운 ‘콜 레뇨’(col legno, 활대로 현을 치는 주법) 주법까지 나와 연주자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악기 주자들은 [환상 교향곡]을 연주할 때면 소중한 활이 망가질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하지만 베를리오즈가 아무 이유도 없이 연주자들에게 이런 이상한 연주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악기의 ‘콜 레뇨’ 주법의 경우는 5악장에서 마치 해골들이 춤을 출 때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듯 오싹한 느낌을 전해주기 위한 것으로 그 연주효과는 대단합니다.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연주하는 목관악기 주자들 역시 비중 있는 악구를 완벽하게 소화해내기 위해 애를 먹습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 속에서 관악기 주자들은 때때로 화려한 독주자처럼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반주자로 역할을 바꾸기도 하면서 종횡무진 배역을 바꾸지요. 때때로 목관악기 주자들은 매우 어려운 솔로를 연주해야하는 부담을 느끼는데, 5악장에 등장하는 E플랫 클라리넷의 선율은 장식음이 많이 붙어있어 잘 연주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대로만 연주하면 마귀처럼 변모한 연인의 흉한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듯 생생한 느낌을 오싹할 정도로 실감나게 전해줍니다.


베를리오즈는 음향층을 세분화해 [환상 교향곡]의 기괴한 분위기를 탁월하게 묘사했다. <출처: wikipedia>


 

대규모 악기 편성과 상식을 깬 관현악법으로 다이내믹한 관현악곡을 만들어냈던 베를리오즈는 그 자신의 독특한 관현악 기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근대 악기법과 관현악법’이라는 저서에 담아 후대 음악가들에게 알렸습니다. 여러 나라말로 번역된 이 저서는 관현악법의 명저로 바그너를 비롯한 혁신적인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베를리오즈가 워낙 기발한 관현악법을 구사한 탓에 그의 추종자들도 베를리오즈만큼 혁신적이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이상적인 음향을 위해 고정관념을 철저히 배제했던 베를리오즈의 혁명적인 정신은 이후 관현악의 전성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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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규 / 음악 평론가,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의 저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 박사과정 수료하고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부수석 및 기획홍보팀장을 역임했다. 월간 <객석> 및 <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음악평론가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의 전당, 부천필, 풍월당 등에서 클래식 음악을 강의하고 있다.

음원 제공 소니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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