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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캠핑,기타자료/수도권 명산 30선

(19) 검단산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9. 16.

높지 않지만 조망은 천하제일… 발아래 한강 굽이굽이 천리길
(19) 검단산
▲  지난 14일 경기 하남시 검단산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한강과 팔당대교. 왼쪽 미사리, 오른쪽 예봉산이 박무에 가려 아스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남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  검단산의 애니메이션고교 들입목으로 오를 때 만나는 낙엽송 숲길.
경기 하남시 검단산(黔丹山·657m)은 하나의 능선으로 이루어진 홑산으로 한강을 따라 남북으로 놓여있다. 산의 모습이 단순한 만큼 산행을 할 때도 초입은 야산의 느낌을 주지만 오르다 보면 여느 산보다 빼어난 조망과 아름다운 숲이 우거져 있다.

검단산은 해발 50m 이하에서 산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보기보다 힘이 든다. 검단산 산행에서는 역시 한강의 조망이 최고다. 검단산은 한강 건너 예봉산과 나란히 마주보며 팔당협곡을 형성한다. 팔당댐은 이 협곡에 건설된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아직 논란이 되고 있지만, 검단산 일대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 13년 이래 근초고왕 25년까지 370년 동안 ‘한성백제’(초기 백제)의 도읍지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현재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그 하남위례성 터였다는 것이다. 이는 재야사학계의 주장이고, 주류사학계는 서울 송파구 일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의 주성(主城)이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당시 하남위례성의 진산(鎭山)이 검단산이었을 것이라는 데 큰 논란은 없다.

검단(黔丹)이란 산 이름이 범상치 않다. 백제 위덕왕 때 검단으로 불리는 선사(禪師)가 이곳에 은거했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도 있지만 근거는 약하다. ‘검’(黔·검을 검, 귀신 이름 금)을 ‘금’으로도 읽어 ‘금단산’으로도 불렸다. ‘단’(丹)은 ‘봉우리’라는 뜻도 있는데, 이를 통해 백제시대 검단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산 정상에서의 전망을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에 서면 팔당댐은 물론이고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류 지점인 양수리 일대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오고 건너의 예봉산, 운길산과 서울 방향의 도봉산, 북한산도 조망할 수 있다. 산의 기운이 다른지, 검단산을 찾았을 때는 언제나 기분 좋은 산행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지방자치단체 간에 한때 ‘도미(都彌) 부인’ 모시기 경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2003년쯤 지자체 간에 ‘축제 만들기’ 경쟁이 불붙었을 때였다. 돌아보면 성하게 남아있는 게 별로 없는데 ‘도미 부인’도 그 중 하나다.

알다시피 ‘도미전’은 고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백제 개루왕이 천한 백성인 도미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다가 끝내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결국 왕은 도미의 두 눈을 뺀 뒤 강에 띄워 보냈는데 도미 부인이 쫓아가 남편과 함께 고구려 땅 산산(蒜山)으로 도망가 생을 마쳤다는 내용이다. 조선 세종이 도미전을 ‘삼강행실도’에 수록해 열녀의 표상으로 삼으면서 한반도 역사에서 최초의 열녀전으로 꼽혀왔다.

문제는 도미부인이 건넜다는 그 나루가 어디냐는 것이다. 가장 먼저 충남 보령시가 오천면 소성리에 ‘도미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미부인 사당인 ‘정절사’를 세우며 기민하게 움직였다. 서울 강동구도 한성백제 주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인근 천호동 광나루터가 바로 도미의 아내가 건넌 나루터라고 연고권을 주장하며 인근 천호1동 천일어린이공원에 도미부인 동상을 건립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하남시 검단산 아래 도미나루를 이 설화의 고장으로 가장 유력하게 꼽는다. 검단산과 예봉산 사이의 협곡을 예전에 두미협(도미협)이라 불렀고 강 이름을 두미강(도미진, 도미강)이라고도 했다. 더구나 이 지역은 한성백제가 오랫동안 터를 잡은 곳이며, 조선왕조실록 등 10여 권의 조선시대 문헌에도 하남이 도미나루의 본고장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하남시의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였으나 아직 시가 도미나루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은 못본 것 같다. 검단산은 이처럼 2000여년 전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도 품고 있다.

검단산은 서울에서 교통이 편리하고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어 오르기 편하다. 들입목은 하산곡동산곡초교 쪽과 팔당댐 건너 아랫배알미쪽, 창우동의 한국애니메이션고교 방면에서 유길준묘나 현충탑으로 지나는 등산로 등이 주로 이용된다. 정상에서 창우동까지는 3.05㎞, 산곡초교까지는 2.55㎞, 아랫배알미까지는 약 3㎞ 정도가 된다. 산곡초교 들입목은 가장 빠른 코스지만 경사가 심하다. 몇번 다녀보니 애니메이션고교에서 유길준 묘를 거치는 코스가 한강을 조망하기 좋고 비교적 완만하게 오를 수 있어 가장 좋았다. 하산은 산곡초교 쪽으로 하면 된다. 지난 14일에도 이 코스를 택했다.
검단산만큼 낮으면서 시원한 조망을 가진 산을 찾기는 어려운데 이 코스는 그 중 전망이 가장 좋다. 코스 중턱쯤에 전망바위(572m)에만 올라도 가슴이 탁 트인다. 그곳에서 도미나루가 어디쯤일까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 같다.

요즘은 검단산에서 능선이 이어진 고추봉(570m)을 거쳐 용마산(595.4m)까지 종주도 유행이다.

엄주엽기자

 

 

여기 아세요? 유길준 “조국을 위해 한 일 없어… 묘에 비석 세우지말라” 유언 남겨

평가 엇갈려 애국지사 공훈 못받아
검단산에는 개화기 최초의 국한문 혼용 서양견문록인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兪吉濬·1856~1914)의 묘소가 있다. 창우동 애니메이션고교에서 왼쪽으로 가다보면 묘소 입구 방면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온다. 들입목에서 한 20분 정도를 오르면 유길준과 그 직계의 묘소가 나온다.

조선의 문신이자 구한 말의 정치가·개화사상가였던 구당(矩堂) 유길준은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정치 일선에 있기보다는 배후에 있었고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구금과 유폐의 세월 속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불운한 지성이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환국을 기획하다가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정치적으로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10년 10월 한일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됐다. 도산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은 전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유길준이 앞서 만든 흥사단에서 따온 것이다.

유길준은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치며 계산학교 등 학교설립, 노동야학회 등의 활동을 펼쳤다. 조국을 위해 한 일이 없어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는데 자손들이 묘비를 세웠다. 유길준은 역사적 평가가 엇갈려 애국지사로 공훈을 받지는 못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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