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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캠핑,기타자료/수도권 명산 30선

(21) 서울 서대문구 안산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9. 30.

 

<수도권 명산 30選>온갖 風霜 견뎌온 사연 많은 산… 오르고 보면 어머니 품처럼 포근

(21) 서울 서대문구 안산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9.30 14:23

 


우리나라엔 '길마재'란 지명이 여럿 된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재'는 높은 산의 마루 혹은 길이 나 있는 고개를 지칭한다. 안장처럼 편안하게 생긴, 나지막한 산마루나 언덕을 길마재로 불렀다.

↑ 안산의 봉수대. 북쪽 변방에서 달려온 봉수가 이곳에서 최종 목적지인 남산으로 전달된다.

↑ 안산은 높이에 비해 서울시내를 잘 조망할 수 있어 해맞이 장소로도 유명하다. 안산에 올라 바라본 서울의 경관이다. 왼쪽이 인왕산, 가운데 아래가 서대문형무소(지금은 서대문역사공원), 오른쪽 위에 남산이 보인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서정주 시인이 1975년 펴낸 대표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질마'는 '길마'가 구개음화가 안 된 상태로 굳어진 것이다. 표준어로 했다면 '길마재 신화'인 셈이다. 질마재는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의 선운리 마을이다. 우리나라에 안현(鞍峴)이라는 지명도 많은데 모두 길마재 밑에 있는 마을(峴)로 보면 된다.

서울 서대문구 안산(鞍山·295.9m)이 예전엔 길마재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 안산현(鞍山峴)은 안산 아래 마을, 지금의 현저동(峴底洞)을 일컬었다. 왕기가 서렸던 인왕산과 마주하며 무악재(毋岳-)를 만들고 있는 안산은 그 능선이 안장처럼 편하게 생겼다.

안산의 명칭은 몇 개나 된다. 각각의 이름에는 왕도(王都)의 바로 외곽을 지키던 이 산이 지켜본 역사가 배어 있다.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할지 몰라도 28일 안산을 찾았을 때 이러한 역사를 더듬으며 숙연해졌다. 안산은 무악산으로 오랫동안 불렸고 지금도 그 이름에 익숙한 사람이 많다.

무악재에서 온 이 명칭은 조선 건국 당시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준 무학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또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어서, 이를 막기 위해 이 산의 이름을 '어머니의 산'이란 뜻으로 '모악'이라 지었다는 설도 있다.

'봉우재'로도 불렸는데 안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에서 연유했다. 안산에는 동서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현재 봉수대는 1994년 서울정도 600주년을 기념해 복원한 동(東)봉수대다. 이 봉수대는 평안도와 함경도부터 달려온 봉수가 남산의 제3봉수대로 최종 보고되기 직전의 봉수였다.

무악재는 한양의 북서쪽 경계이자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교통·군사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중국 사절들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 이곳에 사절을 맞는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을 지었다. 안산은 '모화현'이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고종의 동의를 얻어 영은문을 허물고 1897년에 완공한 것이 독립문이다.

안산은 한양의 관문을 끼고 있다 보니 조선 시대 '이괄(李适)의 난' 때 승부처였고, 6·25전쟁 때도 서울 수복 당시 최후의 격전장이 되기도 했다.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된 이괄은 1624년(인조2) 변방인 영변에서 군사를 이끌고 한달음에 궁궐을 점령했다. 뒤를 쫓은 장만(張晩)의 군사가 서대문 밖 안산에서 진을 치고 이괄과 대치했다. 이괄은 한양 백성들에게 "단숨에 무찌를 테니 구경하라"며 1만 군사를 이끌고 안산을 공격했다.

당시 이 전투를 구경하려는 백성들로 맞은편 인왕산이 온통 무명옷의 하얀색으로 뒤덮였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싸움 구경이 제일이었던 모양이다. 그해 정월 세찬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이괄은 패퇴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 전투사 교과서에도 이 싸움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6·25전쟁 때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 탈환을 도모하면서 마지막에 대치한 곳이 안산이었다. 유명한 '연희(延禧) 고지' 전투가 그것이다.

안산은 '연희전문대', 지금의 연세대, 이화여대 뒷산이기도 한 걸 보면 그 '내공'이 만만치 않다. 무학대사가 이쪽으로 궁궐터를 생각했었다는 얘기도 있다. 여하튼 국군 해병대 제1대대가 9월22일 안산을 점령하고 결국 9·28 서울 수복을 한 것이다. 오르면 편안하기만 한 안산인데…, 여기서 숨진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가슴이 싸해진다.

안산은 300m가 채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이처럼 역사적으로 할 말이 참 많은 산이다. 안산을 오르는 들입목은 여러 군데다.

경기대 쪽부터 독립문 쪽, 홍제동 쪽, 신촌 쪽 등 어디로 오르든 길게 잡아 두 시간이면 족히 종주를 할 수 있다.

안산은 높이에 비해 희한하게 물이 많은 산이다. 샘터가 무려 20여군데는 돼 수통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산이 안산이다. 물맛도 좋다.

서대문구 냉천동도 안산에서 솟아나는 물이 차고 달아 생겨난 이름이다. 지금은 전부 안산으로 부르지만 그 지맥인 김화산(金華山) 기슭에서 특히 약수가 많이 솟아났다. 금화터널은 금화산에서 이름 지어졌다. 안산은 산책하듯 오르면서 주변 경관과 역사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좋은 산이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여기,아세요?…“기록하리라,작가 되리라”…박완서 문학의 뿌리 ‘현저동’
 

 

▲  서대문형무소 뒤편 안산 자락 어딘가에서 박완서는 모두가 피난해 적막한 서울시내를 바라보며 작가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은 독자라면 그 마지막 장면임을 금방 알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 많던…’도 자신의 어린 시절과 특히 개인사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6·25전쟁에 대한 회고다. 바로 작가가 ‘작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장면, 그 장소가 바로 서대문구 ‘안산’ 자락 ‘현저동’이다. 박완서를 좋아하는 독자야 워낙 많지만 그중에 안산 자락인 현저동 그 어딘가, 이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의 장소를 찾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너무 인상적이기에….

서대문구에서 소설과 작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그 마지막 장면의 장소에 안내판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현저동은 박완서의 거의 전 작품에서 배경이라고 봐도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사실은 작가 자신)은 개성 부근의 박적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곱 살 무렵에 서울로 이사를 온다.

그곳은 서대문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현저동 판자촌, 지금의 안산 자락이었다. 여기에서 성장해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하지만 그해에 6·25전쟁이 터진다.

서울을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차지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은 뒤, 1·4후퇴 때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총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돼 돌아온 오빠를 리어카에 싣고 무악재를 넘다가 힘들어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다시 현저동으로 올라와 모두가 피난을 떠난 서울을 내려다보며 작가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낀다. 작가는 “그때, 이건 나만 봤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거기서 “기록하리라, 이를 위해 작가가 되리라”고 결심한 것이다.

안산은 박완서 문학의 ‘뿌리’다. 서대문형무소, 지금은 서대문역사공원 뒤편 안산 자락 어딘가가 그 장소일 것이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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