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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캠핑,기타자료/수도권 명산 30선

(18)아차산-용마산-망우산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9. 9.

 

<수도권 명산 30選>잔잔한 능선길 ‘쉬엄쉬엄’… 사방팔방 둘러봐도 거칠 것이 없어라

(18)아차산-용마산-망우산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9.09 12:21

 


"한강을 굽어보며 아차산 정기를 받는다."

1990년대 초반쯤, 아차산 한강변 신축 아파트의 분양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광고 카피로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아차산에 오르면 대번에 실감이 간다. 아차산(峨嵯山·287m)은 나지막한 높이에 비해 한강을 따라 돌아가는 그 시계(視界)는 거의 300도가 넘을 성싶다. 그만큼 사방팔방 전망이 트여있다. 왜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도 군사적 각축장이자 격전지였는지 알 수 있다.

↑ 코스 : 아차산공원관리사무소 ~ 팔각정 ~ 낙타고개 ~ 아차산 정상 ~ 제2 헬기장 ~ 용마산 정상 ~ 제2 헬기장 ~ 깔딱고개~망우리묘역 ~ 사색의 길 ~ 망우리공원묘지관리사무소

↑ 용마산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아차산은 서울을 가로지르며 돌아가는 한강의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지난 7일 아차산 제4보루에서 바라본 한강이 손에 잡힐 듯하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1977년 아차산 부근에서 토지구획 작업을 하다 특이한 형태의 토기, 온돌 흔적과 석축, 화살촉 등 많은 무기류가 발견됐는데 집안(集安)지역에서 흔히 나오는 고구려 유물의 형태였지만 이 지역이 백제 땅이었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9월에 아차산에서 고구려 병사들이 쓰던 사발모양의 투구인 복발(覆鉢)과 고구려 토기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면서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됐고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등 인근 봉우리와 능선에서 16개의 고구려 보루(堡壘)가 확인됐다. 아차산에서 고구려 온달장군이 전사했다는 게 단순한 전설만이 아닌 사실(史實)로 신빙성을 얻게 됐다.

김부식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에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계급을 초월한 연예담 등 전설과 사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중 온달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 아단(阿旦)에서 죽었다는 부분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아단'은 지금의 아차산이다. 죽은 온달의 관을 운구하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자 아내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됐으니 돌아가소서"라고 하자 움직였다는 '짠한' 전설이 남아있다. 구리시는 매년 온달장군 추모제를 열고 있다.

아차산은 신라말, 고려 초에는 호족들 간 각축에서 왕건이 차지했던 것으로 나오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왕이 이곳에서 사냥을 했다거나 사냥하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들이다. 당시만 해도 온갖 짐승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1960년대에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나온 박격포탄을 갖고 놀다 폭발해 사망했다는 뉴스들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6·25 때도 격전장이었다.

아차산에는 조선 명종 때 유명한 점쟁이였다는 홍계관의 전설도 전한다. 명종이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홍계관을 시험했는데, 쥐의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사형을 명했다. 그런데 잠시 뒤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 '아차' 하고 사형 중지를 명했으나 이미 홍계관은 죽임을 당했고,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용마산과 망우산까지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다. 세 산은 능선으로 연결되고 고구려 보루도 나란히 지니고 있다. 광진구와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종주는 도상으로는 10㎞ 안쪽, 실제는 12㎞ 정도로 3~4시간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높낮이가 크지 않은 능선길이 일품일 뿐 아니라 한강과 서울 방향 전망이 모두 좋아 추천할 만하다. 지난 7일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을 거쳐 아차산으로 들어갔다. 아차산역을 통해도 된다.

안내판을 따라 10여분 가다보면 아차산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들입목이 나온다. 생태공원으로 잘 꾸며 놓았다. 해맞이광장이라 이름붙인 언덕을 오르면 벌써 한강과 서울의 조망이 탁 트인다. 보루를 따라 걷다보면 더 좋은 전망을 여럿 만나게 된다.

아차산에서 용마산(龍馬山)을 바라보면 마치 온달장군이 타던 '용마' 같은 모양과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용마산은 조선시대 산 아래에 말 목장이 많아 그 같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명 장군봉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역시 중랑천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의 보루가 여럿 발견됐다.

망우산(忘憂山·281m)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10여분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주능선으로 붙어야 한다. 아차산 끝은 긴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가 돼 있는데 이들 계단을 내려서면 거기서부터 망우산이다.

망우산보다는 망우리공동묘지로 유명하다. '망우리(忘憂里)'란 이름은 태조가 지금의 구리시 건원릉 자리에 자신의 묏자리를 정하고 돌아오다 이곳에서 '이제 시름을 잊겠다'(於斯吾憂忘矣)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하는데, 이곳에 공동묘지가 들어설 것을 예고를 한 듯하다. 망우산은 고즈넉한 분위기로, 언제 걸어도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 같다. 산의 끝자락은 공원묘지관리사무소로 연결된다.

엄주엽기자

 <수도권 명산 30選>여기 아세요? 고적한 분위기의 ‘사색의 길’서 한걸음 한걸음… 詩心이 절로~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9.09 12:21

 

학생 때 문학잡지에서 황석영의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이란 짧은 소설을 읽었다. 대물림하는 분단의 상처를 이장(移葬)하는 단 하나의 장면에 녹인 작품인데, 읽은 독자가 많지 않을 것 같다.

몇년 전에 작가를 만났을 때 그 소설 얘기를 꺼냈더니 다소 놀라는 표정이었다. 자신도 잊고 지낸 것처럼. 그러면서 그는 소설의 제목을 외국의 어떤 시인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일러줬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든 망우산에 가면, 착 가라앉았으면서도 그 아래 역사의 상흔이 꿈틀대던 소설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 망우리묘지공원의 시인 박인환의 묘소 앞에 세워진 ‘목마와 숙녀’ 시비.

망우산은 흔히 망우리공동묘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망우리묘지공원으로 불린다. 한강 조망이 좋은 위치여서 묘역으로선 더할 나위가 없는 명당이란 느낌이다. 1933년 망우산 일대 83만2800㎡의 공간에 묘지공원이 조성됐고 1973년쯤 2만8500여기의 분묘로 가득 찼다. 공원조성을 위해 그동안 이장과 화장을 장려해 지금은 1만여기 정도가 남아있다. 연고가 없는 묘소들도 아직 많은 모양으로, 언제까지 유족이 연락하지 않으면 파묘한다는 알림판이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이 묘역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오세창, 한용운, 종두법 보급의 선구자인 지석영, 진보당 당수로 이승만에 의해 사형을 당한 조봉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 등의 묘소가 있다. 또 시인 박인환, 사학자이자 언론인 문일평, 화가 이중섭, 소설가 계용묵·김말봉, 작곡가 채동선 등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 각기 다양하게 삶을 살고 간 이들이고 역사적 평가도 엇갈리지만, 같은 산에 누웠으니 다를 게 없어 보인다.

1998년에 공원 내의 순환도로 5.2㎞를 산책로로 만들어 그 이름을 '사색의 길'로 짓고 이들 유명 인사들의 묘소에 '연보비'를 세웠다. 고적한 분위기의 '사색의 길'을 걸으며 이들의 묘소를 둘러보는 것도 이 산에서 놓칠 수 없는 경험이다.

박인환 시인의 묘소 앞에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목마와 숙녀' 중 한 구절을 새긴 시비가 서 있다.

엄주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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