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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캠핑,기타자료/수도권 명산 30선

(17) 인왕산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9. 2.

 

<수도권 명산 30選>“서울 한복판이 내 품안이로다”… 虎탕한 산세

(17) 인왕산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9.02 14:21 | 수정 2011.09.02 14:31

 

인왕산(338m)은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해서 조선 초까지 서산(西山)이라 불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5년(1433)에 인왕산(仁王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시대부터 이 산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거기서 유래했다고도 전한다. 현재 인왕산 서쪽 너머 무악동 기슭에 '인왕사'란 절이 있지만 역사가 130년 정도밖에 안 됐다.

↑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인왕산의 그림자가 잠겨 있다. 김낙중기자

↑ 풍수적으로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이 경복궁을 감싸안고 있다.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한데, 아직도 '仁旺山(인왕산)'으로 적는 글들을 적지 않이 보게 된다.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여러 옛 지도에도 '仁王'으로 적혀 있다. 일제가 '일·왕(日·王)'의 뉘앙스가 있는 '旺(왕)'자로 간교하게 고쳐놓은 것을 1995년 뒤늦게 바로잡았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인왕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도성의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그래선가, 인왕산은 유별나게 '호랑이'와 인연이 많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모양부터 호랑이와 닮았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인왕산이 마치 호랑이가 남쪽으로 도성을 호위하면서 웅크린 모양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주산(主山)인 북악산(北岳山)과 비교하면, 인왕산은 주산을 압도하는 기상과 멋을 지녔다. 조선시대부터 적지 않은 화가들이 인왕산을 그렸지만 북악산을 그린 것은 못 본 것 같다.

실록을 검색해 보면 백악산(白岳山·지금의 북악산)은 68건이 나오지만, 인왕산은 99건이 등장한다. 당시에도 인왕산이 주산보다 더 화제가 된 것이다. 실록에 인왕산이 등장하는 경우는 크게 호랑이와 '풍수 논쟁' 때문이었다. 세조·선조 때 등에 호랑이가 궁궐에 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인왕산 호랑이'가 괜한 말이 아니다. '인왕제색도' 같은 옛 그림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인왕산이 우거졌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에 많이 훼손이 됐겠지만 6·25 이전까지만 해도 특히 오래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한양 천도 시 궁궐터를 둘러싸고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과 무학대사의 '인왕 주산론'이 맞붙었다. 둘은 한양을 도읍으로 하는 데는 의견이 같았으나 궁궐의 방위에 대해서는 달랐다. 무학은 인왕을 중심으로 동쪽 방향으로, 정도전은 북악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궁궐을 짓고자 했다. 결국 정도전이 "예로부터 제왕은 남면(南面) 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東向)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는 논리로 태조를 설득, 북악이 주산이 됐다.

고려 쇠망의 원인 중 하나를 불교에서 찾아 그것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새로운 유교권력이 애초 승려의 말에 따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인왕산을 중심으로 궁궐을 동쪽으로 짓자면 상당히 어색하다.

지난 8월27일 시계가 맑았던 날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와 너머의 산들을 유심히 둘러보니, 이곳에 올랐을 그 어른들의 풍수 논쟁이 괜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 올라가서 직접 보시라.

인왕산은 조선시대부터 이제껏 이 땅 권부(權府)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본 산이다. 그 동쪽 기슭 동네도 경복궁과 조선총독부, 중앙청과 청와대가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풍상을 겪었다. 지금은 몇몇 동(洞)을 제외하고 다소 쇠락한 분위기가 됐다.

인왕산은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무장공비 일당의 '1·21사태' 이후 출입이 통제되다 1993년 5월에 개방됐다. 지금은 주변 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산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인왕산은 사직터널에서 자하문까지 능선을 따라 쌓았던 도성의 성곽이 남아 있다. 사직공원에서 활을 쏘는 황학정을 거쳐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가다가 고개의 초소 맞은편 계단으로 오르는 길이 성곽로를 따라 걷는 인왕산 종주코스의 관문이다.

물론 반대편 독립문 방면에서도 이리로 닿을 수 있다. 그런데 8월30일부터 내년 5월27일까지 성곽 보수공사 때문에 여기 들입목이 통제돼 있다. 이전에는 선바위를 둘러보고 성곽 중간에 능선으로 오르는 '비공식' 루트가 있었는데, 성곽 보수공사 이후 막아 놓아 오를 수 없다. 따라서 인왕산길(도로)을 돌아 '석문'으로 오르는 들입목을 이용해야 한다.

범바위쯤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청와대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범바위를 지나 주봉으로 가파르게 오르는 돌계단길을 만난다. 돌을 깎아 만든 이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기분도 썩 좋다.

정상에 서면 바로 동쪽 아래편으로 깎아지른 암괴 덩어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매바위와 치마바위다. 종주를 하자면 북쪽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기차바위를 타고 내려가 부암동 하림각 쪽으로 빠지거나 홍제동 채석장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오른쪽으로 자하문 방향으로 내려갈 수 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수도권 명산 30選>여기, 아세요? 조선때부터 아이 못낳는 여인네들의 기도처 ‘선바위’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9.02 14:21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세란병원 뒤쪽 현저동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인왕산 국사당(國師堂)과 '선바위'가 나온다.

이곳에 올라보면 '무속(巫俗)'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그 위쪽으로는 항시 무속인들이 치성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대도시에서 배제된 것들이어서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조선시대, 나라의 굿당이었던 국사당(중요민속자료 제28호)은 원래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 참선한다는 선 자를 따서 이름 붙인 선바위. 김낙중기자

일제가 1925년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강제로 이전시켰다. 국사당의 이름은 '임금의 스승(國師)' 대접을 받은 무학대사를 신주로 모신 데서 유래했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이유도 바로 '선바위'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 위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인 선바위(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는 우뚝 '서 있는' 바위라 해서 '선바위(立巖)', 그 모양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고 참선하는 것 같다 해서 '선바위(禪巖)'라고도 불렸다.

선바위에는 앞서 얘기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유불(儒佛) 갈등이 깃든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都城)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로 의견이 대립됐다.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면 불교가 왕성해져 유학이 힘을 못 쓰고, 성 밖에 두면 반대로 승려가 힘을 못 쓰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태조가 결정을 못 내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눈이 녹지 않은 자리가 있어 태조는 그곳에 성을 쌓을 것을 지시했고, 결국 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 그래서 한양이란 명칭이 '설(雪) 울타리'→'설울'→'서울'로 됐다는 것인데, 근거는 아주 미약한 구전이다.

선바위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네들의 기도처로 조선시대부터 얼마 전까지도 유명했다. 바위 앞쪽에서 보면 다소 그로테스크한 형상이지만, 뒤에서 보면 정말 장삼을 입은 승려 둘이 나란히 앉아 남산과 서울시내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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