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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캠핑,기타자료/수도권 명산 30선

(14) 남한산성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8. 12.

 

<수도권 명산 30選>‘조선의 굴욕’ 잊지마라 ‘山城의 외침’ 들리는듯

(14) 남한산성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8.12 14:21 | 수정 2011.08.12 14:31

 


남한산성(南漢山城)만큼 우리 역사의 갖가지 아픔을 지켜본 터도 없을 듯하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몽진(蒙塵)을 해 47일간 저항을 한 곳이 남한산성이다. 버티기 어려워진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송파의 한강변 삼전도에서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예를 올려 항복을 했다. 당시는 몹시 추운 겨울, 얼음 바닥에 인조가 머리를 조아리는 사이 청태종은 오줌을 갈겼다고 하니 치욕도 그런 것이 없을 것이다.

↑ 남한산성 서문과 성곽이 지난 10일 옅은 운무에 가려 있다. 남한산성 서문 성곽 바깥쪽 길은 경기 하남을 둘러싼 객산, 남한산성, 금암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 39.7㎞의 위례 둘레길과 연결된다. 광주 = 김낙중기자 sanjoong@munhwa.com

예전에 군생활을 한 이들에게 '남한산성 간다'는 말은 '육군형무소에 수감된다'는 의미였다. 1985년까지 30년이 넘게 이곳에는 육군형무소가 있었다. '남한산성'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군복무자들에겐 공포의 표상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1년 남짓 후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남한산성 중턱에 5·16군사혁명기념탑이 세워졌다. 바로 이곳 육군형무소 재소자들이 만들었는데, 당시 신문 사진을 보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이었다.

묘하게 이승만 정권 때도 남한산성은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1955년 6월 이승만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대통령 이승만 박사 송수탑(頌壽塔)'이 3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됐고, 광주 복정리에서 남한산성에 이르는 새 도로를 이승만의 아호를 따 '우남로'로 명명식을 했다. 탑과 도로 이름은 언젠가 사라졌지만, 남한산성의 대표적 건조물인 수어장대(守禦將臺) 옆, 남한산성에서 가장 숙연한 장소인 '무망루(無忘樓·오른쪽 사진)' 바로 곁에 '리대통령각하 행차 기념식수'라는 삐죽한 비석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역사의 무게와 상관없이, 남한산성은 오랫동안 서울시민들에게 유명한 피서지요 유원지였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일제가 경성(서울)에서 남한산성 내 산성리까지 도로를 뚫고, 당시 착취의 첨병이었을 경성철도가 이곳에 시설투자를 한 것을 보면 관광지로의 개발 가능성을 크게 봤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남한산성은 서울 학생들의 대표적인 소풍 장소였는데, 지금도 산성 내로 들어가는 도로가 아슬아슬하지만, 당시 이곳에서 소풍버스가 뒹구는 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 10일 남한산성 성곽길 종주를 위해 찾았을 때도 산성리에는 고래등 같은 먹고 마시는 집들만 즐비한 가운데 '남한산성 역사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이 서 있어 '무망루'의 정신을 무색하게 했다.

어쨌든 남한산성은 '참 좋은' 등산로다. 역사적 사적지가 즐비할뿐더러, 나이 먹은 키 큰 송림이 우거진 성곽길은 아름답고 경사도 완만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남한산성 성곽은 전체 11.76㎞(본성 9.05㎞, 외성 2.71㎞)지만 성곽길을 빙 둘러 걷는 길은 7㎞ 남짓 된다. 남한산성은 가장 높은 남한산(522m)과 청량산(482.6m) 등 낮은 산들로 둘러쳐져 있지만 성곽길을 한 번 돌자면 간단치는 않아 3시간30분 정도는 잡아야 한다. 산성리 안에서 시작하자면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이나 산성역에서 내려 9번 버스를 타고 산성리까지 들어오면 된다. 산성리에는 역사관과 옛적 군사훈련을 하던 연무관, 남한산성 행궁 등 구경거리들이 다양하다. 행궁은 보수공사 중이라 내년 초에나 다시 볼 수 있다. 보통 산성리에서 지화문(至和門)으로 부르는 남문을 통해 시계 방향으로 타는데, 이럴 경우 원점산행에 편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찾았을 경우 우익문(右翼門)으로 부르는 서문부터 올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돈 다음 출발지이자 종착지인 서문에서 마천역 쪽으로 하산하면 좋다. 후자 쪽을 택했다.

산성리에서 서문쪽으로 20분 못 미치게 오르다 보면 능선이 나오고 북문을 만난다. 이번 비에 산성 여기저기가 훼손돼 보수가 한창이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길은 적송을 비롯해 소나무들이 볼 만하다. 서문에서 지근거리에 수어장대가 나온다.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는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수어청 장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수어장대 옆에는 무망루가 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의 세자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그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수어장대 안쪽에 붙여 놓았던 현판이다.

성곽길은 남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남문부터 다시 서서히 오르면서 2개의 옹성(甕城)을 지난 뒤 좌익문(左翼門)으로 부르는 동문으로 경사가 급하게 떨어진다. 동문은 바로 산성리 바닥까지 내려가 있으며 성곽종주에서 유일하게 도로를 건너 만나야 한다. 동문에서 동장대터까지 오르는 길이 성곽종주에서 가장 힘든 코스다. 하지만 주변 경관이 좋아 쉬엄쉬엄 오를 만하다. 하산은 서문에서 학암동 방면으로 해 마천역을 이용하면 된다.

광주 =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수도권 명산 30選>여기, 아세요?… 이회 장군 전설깃든‘매바위’… 발톱자국은 일제가 떼내가

문화일보 | 엄주엽기자 | 입력 2011.08.12 14:21

 


역사의 풍상을 지켜본 남한산성에는 갖가지 설화와 그에 얽힌 명소도 적지 않다. 그런 장소를 찾아보는 것도 남한산성 성곽길 종주의 재미 중 하나다.

수어장대 앞쪽에는 매바위라는 커다란 암석이 있다. 1626년(인조 4년) 성곽을 완성했을 즈음에 산성 축성의 총책임자는 '이회' 장군이었는데, 워낙 꼼꼼하게 성벽을 쌓다 보니 경비도 부족하고 공기도 늦어졌다. 이회 장군은 사재로 경비를 충당했지만 오히려 공사 경비를 주색에 탕진했다는 누명을 썼다. 이회 장군은 구차한 변명 없이 "내 죄가 없다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오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참수당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날아갔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나중에야 오해가 풀렸고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온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신성시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 관리가 매 발톱 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가 지금은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남한산성 동쪽 외곽 산성을 따라 나가면 벌봉(蜂巖)을 만난다. 바로 동장대터 암문에서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 등산로가 수풀이 우거지고 푹신해 걷기에 좋다. 암문 밖에서 보면 벌봉은 벌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병자호란때 청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뜨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해서 이 바위를 깨뜨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전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수어장대보다 높아 남한산성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벌봉이 함락당하면서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고 화포로 성 안까지 공격할 수 있었으니 청태종의 예언이 맞았던 셈이다. 당시 청군에 모질게 당했을 민초들이 공포심에서 만들어 낸 전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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