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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허영호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0. 4. 30.

 

 

히말라야 영화를 보고 생각나서

오래전 기사를 스크랩....

 

 

산악인 허영호|(조선일보)
 

 

▲ ▲탄광 막장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돌아온 산악인 허영호는“골치 아픈 게 싫어 산에 혼자 오른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내가 산악계 외톨이라고요? 뭐, 그럴 수 있죠.

산악계 쪽에는 관여를 안 하니까. 행사도 안 나가고 산악인도 잘 안 만나죠.

등반을 가서도 마찬가지죠. 등반이란 본인이 하는 거니까. 그

들의 등반은 그들이 하는 것이고, 내 등반은 내 등반이지요.”
마주 앉은 허영호(53)의 이름은 익숙했지만,

그는 내가 술잔으로 어울리던 산악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종(種)이었다.

그는 에베레스트봉(8848m)에 등정한 뒤 전날 귀국했다. 햇

볕과 눈(雪)에 그을린 흔적으로 어느 탄광 막장에서 막 뛰쳐나온 얼굴이었지만, 

짧게 이발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새였다.
이번 에베레스트 등반은 혼자였다.

네팔 현지에서 두 명의 셰르파를 데려갔을 뿐이다.

그 등정 소식은 단신(短信)으로 처리됐다.

나는 “혼자서 하는 원정은 외롭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질문의 속뜻을 그는 간파했다.
“당연히 외롭고 힘들죠.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혼자서 해왔어요.”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물었고, 그는 또 짧게 대답했다. 질문과 단답(短答)이 수차례 빗겨갔다.

―왜 후배 산악인들과 함께 원정을 꾸리지 않나요?

“큰 원정대를 꾸려가면 마찰이 많아요. 대원들이 말을 안 듣고 대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약속을 안 지키는 친구들이 태반이에요.”

―무슨 약속을?

“돈 문제로 마찰을 몇 번 겪고는 손을 들었어요.

원정 비용을 얼마씩 분담하겠다고 약속했으면 지켜야지요.

산악인들이 그런 약속을 잘 안 지켜요. 서약서 쓰면 뭐해, 꽝인데. 산악인들은 거의 무위도식해요.

등반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열심히 벌어서 원정을 갈 생각을 잘 안 한다고요.

그러니 나 혼자 가면, 빨리 결정하고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 편하죠. 속이 안 썩죠.”

그는 한국 탐험사에서 늘 기록을 남겨왔다.

그전까지 한국 산악인 16명을 앗아갔던 ‘악마의 이빨’ 마나슬루봉(8163m) 정상을 그는 무산소로 처음으로 밟았고,

1995년에는 7대륙 최고봉과 남·북극점 도달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는 세상의 ‘영웅’이 됐지만, 산악계에서는 어느 순간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그를 둘러싼 ‘소문’이 퍼져나갔다. 산악계에서 그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고립과 단절의 세월이 8년이 됐다. 이런 내막은 물론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돈 문제 때문에 동료나 선후배들과 함께 하기 싫다는 뜻입니까?

“그런 이유가 많죠. 원정 경비를 분담한다는 약속을 해놓고 안 지키니까 싫다 이거지.

약속은 꼭 지켜야 하잖아요.”



“99년 원정때 4천만원 초과지출 아무도 책임안져 아파트 팔아…
산악회에 제명 시켜달라 했죠”


―통상 산악인들은 돈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산악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돈은 중요하죠.

그것을 등한시 하면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도태될 뿐이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가난해요.

손가락·발가락을 잘린 산악인들이 솔직히 뭐 영웅이야?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산악인들로서는 모독으로 느껴질 것 같은데요.

“등반에만 매달려 손가락 발가락 잘린 걸 훈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 만큼 일상 생활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면 돈이 나와, 뭐가 나와요.

지금까지 탐험도 그렇고 등반도 그렇고, 저는 항상 조용히 다녔어요.

등반에 대해 과장되게 말 안하고 등산복에 태극기도 안 달고 다닙니다.

산이 좋아서 가는 사람이 태극기를 달 이유가 없죠.

정상에 올라서면 태극기 들고 촬영하면 되는 일이지, 그 외에는 자기가 국가대표선수도 아닌데 왜 태극기를 달아요.

함께 다니는 대원들에게 ‘제발 폼 잡지 말라’는 말을 많이 했지요. 그

리고 등산이 끝나면 ‘깨끗하게 다녀라. 바로 면도하고 머리도 깎아라’라고 말해요.

이제 산 생활이 끝나고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지요.

산은 산이니까 그렇다 치고, 왜 여기 와서 표시를 내느냐는 겁니다.

저는 다른 산악인들처럼 여럿이 어울리는 술자리에는 오래 있지 못해요.

그게 한국적 사회생활에서는 문제가 됐는지 모르죠.”

▲ ▲1987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반으로 인해 가족 부양이 어렵다면 등반을 안 했을 건가요?

“안 하죠. 가족이 제일 중요하죠.

가족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하면서 등반을 계속 해서 뭐해요.

그런 친구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나요? 성공 못하지.

저는 등산보다는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등산이 더 좋다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사는 길밖에 없죠.”

―산악계에서는 당신이 순수한 등반 행위를 비즈니스로 훼손시켰다는 비판을 하더군요.

“아니, 저는 등반을 하면서 비즈니스를 한 게 없는데 무엇을 훼손했다는 것이죠?

이윤이 남아야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것 아니에요?”

―원정대를 꾸리면 기업체로부터 후원을 받죠?

“스폰서를 받죠. 하지만 거의 남는 게 없어요. 제 기준으로 봤을 때는 그래요.

원정비용보다 모자라거나 그걸 다 쓰게 되지.

내가 등반과 탐험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집에서 가져다 쓴 돈이 1억 원이 넘을 거예요.”

―그렇다면 왜 먹고 사는 행위로 등반을 택했지요?

“등반을 통해서 나오는 소산물들이 있으니까. 그

걸로 기업체 등에 초청강연을 다니는 거죠.

한 달에 한 15번 내지 20번쯤 되지요.

그 강연료 수입으로 먹고 살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세금을 내죠.”


“산악인 무위도식 많아 안타까워?” 내겐 山보다 가족이 더 중요
山만 쳐다보면 돈이 나오나요?” 



―후배 산악인들은 그런 것을 잘 못하죠?

“모르겠어요. 잘하는지 못하는지.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제 등반·탐험 자료들을 모두 모았어요.

그건 한국등반사의 기록이지요.

내가 썼던 등반장비, 2만 컷에 이르는 슬라이드 사진을 다 가지고 있어요.

전문 탐험가나 산악인이라면 자신의 분야에 대해 공부를 엄청나게 해야 해요.

그런데 후배들은 공부를 안 해요. 내가 보면 답답해요.”

―통상 강연 요청이 오면 강연료를 미리 제시를 합니까?

    

    “그 쪽에서 말해오면, 제가 조정하는 경우가 있어요. 액수는 자존심과도 관계된 문제이니까요.”

 

―강연에서 등반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혹시 “등반은 무상(無償: 보상 없는) 행위”라는 식으로 말합니까?


     “등반은 무상의 행위라는 것이나, 탐험 등반했던 당시의 목표와 정신력에 관해 주로 이야기를 하죠.”


―실제 무상의 행위로 보는가요?


     “젊은 대원들은 순수한 등반이 많고요.

원정대에 그냥 따라오니까. 그러나 원정대장은 스폰서를 구해서 전체적으로 운영해야 하니까 약간 틀리죠.

그럼에도 크게 보면 등반 자체는 무상 행위이죠. 고생하고 대가가 없잖아요.

 밥벌이와는 전혀 상관 없어요. 손해를 보면 손해를 봤지, 등반에서 남는 돈은 하나도 없어요.

있다면 명성밖에 없어요.”


―등반에서 무엇을 추구합니까?


     “명성이죠. 유명해지는 것이었죠.

물론 처음에는 명성보다는, 히말라야를 안 가봤으니까 높은 산을 올라가봐야겠다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요.

다행히 내 체력과 맞아서 정상을 밟게 됐지요.

그래서 이름이 나니까, 또 다른 도전을 하고 더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이죠.

명성을 얻지 못하면 스폰서가 안 붙죠.”


―세상에서의 명성도 중요하지만 주변사람들의 인정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글쎄, 내 스스로는 그렇게 잘못한 게 없다고 봐요.

누구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으니까. 후배들이 내게 대접을 소홀히 하고 인사를 안 한다고 크게 상처를 받을 게 없어요.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요. 나는 상관 안 해요.”


그의 등반 인생에서 결정적 시점은 1999년 한국산악회 원정대장을 맡아 에베레스트의 북벽 루트로 갔을 때다.

그 원정대는 고난도 벽(壁) 앞에서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문제는 결산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가 원정비용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상은 가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했던 것은 이로 인해 산악계에서 그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전체 예산에서 지출경비가 4000만원쯤 넘어버렸어요. 모두 영수증이 있고 수 차례 점검을 했어요.

어쨌든 이것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어요. 산악회도 책임을 안 졌어요.

원정대원들이 등반 경비를 부담하기로 서약하고도 안 낸 것도 있었고.

그런데 내게 책임지라는 것이었죠. 나는 ‘한국산악회’ 이름으로 대장을 맡아서 갔을 뿐인데. 그런 시비가 2년을 끌었어요.

그러니 말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결국 내가 아파트 팔아서 다 갚아주고, 한국산악회에 나를 제명시켜 달라고 했어요.

산악회 회원, 이 따위는 싫다 이거예요.”

―그 뒤로 산악 행사나 모임에는 전혀 안 나타냈죠?

“사람들이 싫으니까 안 하죠. 산악계에 꼭 남아있어야 등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뒤로 나는 나대로 산에 가고 탐험하고 했지요. 혼자 돼도 열심히 내가 스폰서 찾아서 등반하면 되니까.

난 남들에게 준 것도 없지만 피해준 것도 없어요.”

하지만 홀로된 그 심사가 늘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다.

이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그는 국내의 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원정대가 4팀이나 와 있고,

박영석 원정대도 있지만 내게 얼굴 한번 안 비친다”고 쓸쓸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산악계 선배로서의 어떤 책무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선배로서 해줄게 없는데. 내가 능력이 안 되어서 해줄게 없는데 무슨 책임을 져요.

능력이 안 되는데 폼 잡으면 뭐해요. 사회에서 도태가 될 뿐이죠.”

―세상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오. 혼자 안 살죠. 그러나 나는 산악계 말고도 또 다른 모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결혼할 때 처가에서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산 타는 것으로써 충분히 가족을 먹여 살릴 자신이 있었나요?

“그 때는 직장(시멘트 회사)을 갖고 있었어요.

먹고 사는 것은 보장을 해 놓고 산에 다녔던 것이죠. 대부분 지금 젊은 산악인들은 거의 무위도식 하는데 그것과는 틀려요.

세상에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산을 탄답시고 무위도식한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안타까워요.”

▲ ▲사진=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죽을 고비를 많이 맛봤죠?

“1982년 마칼루봉 원정 때는 정상에서 추락해서 죽을 뻔했고,

83년 마나슬루봉 가을 등반에서는 눈사태에 파묻혀 셰르파들의 구조로 살아났고,

87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는 내려오면서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진 틈)에 빠진 적도 있었지요.

거기서 죽을 수도 있었지요.

그런 사고를 겪으면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죠. 그

런데 그게, 세상으로 돌아오면 또 산에 가고 싶어지니까.”

―올 초에는 초경량 항공기로 국토 1100km를 종단하겠다고 나서, 결국 완도 앞바다에서 떨어졌지요?

“예. 빠졌죠. 한 1억 원짜리 비행기를 날렸지요.

당시 바다에 빠져도 사나흘은 생존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는 ‘바다에서 어떻게 살까’ 그랬지만, 저는 사고 대비 준비를 다 해갔던 셈이지요.

모험이란 늘 준비된 모험이지요.

제게는 비행기가 한 대 더 있어요. 다음달 초 다시 도전 할거예요.”

―지금까지 가장 힘든 원정은 어떤 것이었지요?

“북극 원정이 제일 힘들었어요. 나는 그것을 1995년에 이미 했잖아요.

10년 전에 내가 했는것을, 그 다음에 박영석이가 했지요.

박영석이가 그걸로 매스컴에 크게 나는 걸 보면서, ‘나보다 더 큰 도전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명성을 얻으려면 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지요?

“저는 늘 그렇게 해왔어요. 그래야 스폰서를 끌어 들일 수 있는 거죠.

위험 강도가 계속 높아져야죠. 하지만 자기가 죽으면 모험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

러니까 그 수위를 자신의 나이 수준에 적절하게 맞춰야죠.”


“죽을 뻔한 사고 겪으면 엉엉 울죠, 겁나서…
그런데 세상에 돌아오면 또 산에 가고 싶어지니…” 


―부인은 이런 남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안 좋게 생각하죠. 고산등반 같은 것은 이제 그만하라고 하죠.”

―그럴 때 뭐라고 답합니까?

“대답 안 하죠. 가만히 있죠. 저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말은 안하고 그냥 실행에 옮깁니까?

“그렇죠. 등반 준비는 사무실에서 하니까 아내는 모르죠. 나중에 출발할 때쯤 통보를 합니다.

고산등반들을 미리 상의하면 아내에게 무슨 도움이 돼요? 불안하게 만들뿐이죠.”

―등반이나 모험의 극한 상황에서 그만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지 않습니까?

“그 과정이 몹시 고통스럽고 지루하죠. 하지만 목표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는 않죠.

어떻게든지 버틸 때까지 버텨보는 것이지요. 현실적으로 원정은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원정을 실패하면 다시 기회를 잡기가 어렵죠.

더욱이 두 번 세 번 실패하고 나면 스폰서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죠.

늘 스폰서에 대한 그런 강박관념이 있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까?

“아주 좋다고 생각해요. 정말 행운이죠.

이번 에베레스트에서도 올라가다가 눈사태가 나서 추락했거든요.

그 전날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왔어요. 경사가 있고 로프가 직선으로 걸렸어요.

고정로프니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죠.

딱 잡고 올라가는데 눈이 확 쏠리면서 몸이 20m쯤 날라갔죠.”

―죽음이 앞으로도 이처럼 피해갈 것이라고 봅니까?

“모르죠. 늘 피해갈 지….

이번 등반을 하는 동안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박영석 원정대의 오희준·이현조를 멀리서 봤어요.

벽(壁)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600mm 줌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놨어요.

그리고 나서 이틀 만에 이 친구들이 사고로 숨졌지요.

운명이지요. 나도 혹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이게 내 운명이구나 그래야 겠죠.”

―그런 치명적인 사고를 직접 겪게 되면 겁이 나 울음이 터지지 않습니까?

“울었죠. 엉엉 울었죠.

1987년 추락했을 때 엉엉 울었지요.

또 하늘을 쳐다보고 운 적 많아요. 몸이 말을 안 들어서 엉엉 운 적이 많아요.

등반을 할 때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잘 알아야 해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체력 손실이 많으니까, 자신이 판단을 잘 해야 살아서 돌아오죠.

그런 판단은 경험에서 나오죠. 모험이란 준비되고 계산된 것들이에요.

계산을 못하면 안 되죠. 올라가다가 체력이 안 되면 내려와야 해요. 그 욕심을 못 이기면 안 돼요.

자꾸 무리해서 가다가 탈진상태가 되면 결국 전체 원정대에 피해를 주게 되죠.”

―그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버릴 수 있죠. 그것을 못 버리면 안 되죠.

나도 몇 번씩 정상 바로 밑에서 그냥 돌아온 적이 많은데요.”

―그러면 후회가 안됩니까?

“베이스캠프 텐트로 돌아와서는 후회를 엄청나게 하죠.

‘죽더라도 다치더라도 갔어야 했는데’ 하면서 땅을 칩니다.”

―그런 후회의 경험이 있으면 다시 그런 상황을 맞게 될 때,

‘내가 돌아가서 후회할 짓을 하지 말자’ 며 끝까지 올라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미리 준비를 더 하는 거죠.

그런 상황이 발생해 돌아오지 않게끔 말이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가능한 한 꼼꼼하게 계산하고 준비합니다.”

―본인이 살아온 삶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지금까지 세상을 많이 다닌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그게 내 재산이지요. 내일 죽어도 인생의 후회는 없어요.”

그러면서 “사실 아직도 몇 군데 더 가야 할 곳이 남아있기는 한데…”라고 덧붙였다.

그의 답변은 처음보다 훨씬 길어져 있었다.

나는 이 세속화된 듯한 산악인과 작별하면서, 내가 어울렸던 순정(純情)의 산악인들이 왜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됐고,

그 싫어함이 얼마나 막연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인지도 알게 됐던 것이다.

 





● 허영호는  

3극점·7대륙 최고봉 도달 위업 경비행기 세계일주 탐험에 빠져 

충북 제천 출생인 그는 1m72, 75kg의 체격이다. 유년 시절 장래 희망은 ‘파일럿’이었으나,

고등학교때 우연히 암벽등반을 배운 게 평생 업(業)이 됐다.

1982년 그는 마칼루봉 원정대원 선발 테스트에 합격했다.

남다른 체력과 폐활량으로 정상 공격조에 뽑혔고 정상을 밟았다.

그가 세상에 명성을 얻은 것은 이듬해 마나슬루봉 원정.

한국 산악인 16명을 숨지게 했던 이 악명 높은 봉우리를 그가 등정해낸 것이다.

1987년에는 에베레스트의 국내 최초 동계 등정에 성공했다.

이번 에베레스트 등반은 자신의 기록에 대한 20주년 기념 등반이다.

1993년에는 티벳 방면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가 네팔 쪽으로 넘어오는 종단 등정에도 성공했다.

1994년에는 남극, 1995년에는 북극 도보원정에 성공해 ‘3극점 7대륙 최고봉 도달’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는 요즘 어린 시절의 꿈처럼 경비행기로의 세계 일주 탐험에 빠져있다.

하루 두 시간씩 체력단련을 하고 여러 탐험장비 사용법을 익히는 등 직업산악인으로서 자신의 관리에 철저하다.

꼼꼼하고 내성적이며 가정적이다.

산에서 내려오면 말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낭만파’ 산악인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1954. 4. 16 충북 제천~.

산악인·탐험가.

제천고등학교와 청주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 재학시절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78년 한국 산악회 안나푸르나 4봉 훈련대원으로 참여했다.

1982년 5월 20일 세계 제5위 봉인 마칼루(8,643m)에 도전하여 한국 최초의 마칼루 등정자가 되었다.

그는 1983년 10월 22일 마나슬루(8,163m) 무산소 단독 등정, 1985년 3월 12일 투쿠체 등정, 1986년 1월 12일 타우체 등정, 같은 해 7∼8월 알프스 3대 북벽 등정 등 국내 산악인 중 높이 8,000m 이상의 고봉을 가장 많이 등정한 산악인이 되었다.

특히 1987년 12월 고상돈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2번째, 동계 등정으로는 3번째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8,848m)의 등정에 성공했다.

1989년 아시아 로체(8,516m), 1992년 남아메리카 아콩카과(6,959m), 북아메리카 매킨리(6,194m),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정상에 올랐다.

1993년에는 티베트 쪽에서 네팔 쪽으로 에베레스트를 종단했으며, 1994년 오세아니아 칼스텐즈(4,884m)와 1995년 유럽 엘브루스(5,642m)를 정복했다.

또한 고산등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9년 북자극점 원정을 시작하여 1990년과 1991년 연속 북극점 원정에 도전했다.

1991년 그의 탐험대는 북극점 도보 탐험에 성공했지만, 허영호 자신은 북극점을 지척에 두고 화상을 입어 북극점 도달에 실패했다.

그후 다시 도전해 1994년 남극점 도보탐험과 1995년 북극대륙 도보횡단에 성공했다.

1995년 그는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5,140m)에 오름으로써 3극점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가 되었다.

허영호의 도전은 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1998년 초경량 항공기 조종 면허증을 획득했다.

그리고 2008년 4월 초경량 비행기 '스트릭 새도'를 타고 경기 여주에서부터 제주도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국토종단 왕복 비행에 도전해서 성공했다.

또한 9월에는 독도 비행에도 성공했다. 체육훈장 기린장·거상장·맹호장·청룡장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 〈걸어서 땅끝까지〉가 있다. /브리태니커

 

1987.12.22 - 산악인 허영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

허영호(1954년 4월 16일 ~ ,충북 제천)는 대한민국의 산악인이다.

1973년 제천고등학교, 1989년 청주대학교 체육학과를 거쳐 1994년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1982년 5월 히말라야 마카루 등정을 시작으로 북극점 원정, 남극점 원정,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정 등 2007년 히말라야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르기까지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과 남북극점 정복, 북극횡단, 에베레스트 3회 등정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산악인으로는 1977년 고상돈이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 10년 뒤인 1987년 허영호가 대한민국 산악인 최초로 겨울철에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드림앤어드벤처를 설립하고 초경량 비행기 조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경비행기를 이용 세계일주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2007년 1월 1일 경기도 여주에서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까지 왕복 1100km의 단독 비행에 나섰으나 전라남도 청산도 해상에서 추락하며 지나던 어선에 구조돼 기상 상태와 초경량 비행기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비행을 하였다는 주변의 비판을 듣기도 하였으나  2008년 4월 18일 같은 기종의 항공기로 같은 코스에 재도전하여 1년 4개월 만에 단독 비행에 성공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