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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전 거 /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19. 삼척~양양 <하>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2. 3. 6.

 

 

19. 삼척~양양 <하>

 

영하의 매서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주문진항 어시장은 삶의 활기가 가득했다. 자전거 식객들 앞에서 아침에 잡아온 문어를 펼쳐보이는 한 상인. 동해안은 지금 문어가 제철이다.


목덜미 파고드는 삭풍에
백사장서 날리는 모래바람까지

천근만근 무거운 페달 끌고
마침내 주문진항 도착

강릉 경포대를 지나 주문진을 향하는 북행길에서 바람은 돌파하고 극복해야 할 큰 적(敵)이었다. 한파경보가 해제되며 기온이 전날에 비해 다소 올랐다고는 하지만 영하 15도였다.

맹추위를 무릅쓰고 강릉 병산 솔숲에서 야영하고 난 뒤여서 목덜미를 파고드는 삭풍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행여 체온 저하증에 걸릴 새라 평소보다 RPM을 30%쯤 높여 달렸지만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면에서 불어오는 북풍을 뚫고 달리자니 페달은 천근만근 무겁다. 경포해변을 한가롭게 거니는 관광객들을 보니 대체 우리가 이 겨울에 자전거를 타고 무슨 생고생인가 싶다.

그러나 바람이 자전거 나그네들을 괴롭히는 방법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백사장을 지날 때마다 바람에 날린 모래가루가 입으로, 코로 마구잡이로 들어와 사막에서 모래폭풍을 만난 것과 진배없었다. 쉴 때마다 모래로 지근거리는 입을 물로 헹궈야 했고 신발을 벗어 털면 모래가 한 줌 가까이 나왔다.

경포대 북쪽 5km 지점의 사천진에서 잠시 쉬면서 길을 확인하기 위해 태블릿PC로 위성지도를 들여다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2010년 9월 강화도에서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일주를 시작할 당시 강화도 최북단이 북위 37도 49분이었는데 지금 이 자리, 사천진 역시 37도 49분.

허영만 화백을 앞세우고 구불구불한 대한민국 해안선 2400여km를 자전거로 달려 마침내 17개월 만에 출발점의 위도로 복귀한 것이다.

허영만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사천 해변에 철썩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강화도, 인천, 대부도, 당진, 태안, 군산, 목포, 완도, 제주도, 장흥, 보성, 여수, 남해, 거제도, 부산, 울산, 포항, 울릉도, 울진, 삼척, 강릉… 지도상에 표시된 지나온 길들이 새삼스럽다.

가을에 강화도를 떠난 우리들은 태안반도에서 겨울을 맞았고, 군산에서 봄꽃을 보고, 땡볕이 작렬하는 여름에 뜨거운 남도를 지나 부산의 가을을 통과해 동해를 북상하는 지금 두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허영만이 그린 한 컷 풍경 한파경보가 내려진 상황이고 10분 거리에 펜션, 모텔이 즐비한데 추위를 무릅쓰고 강릉 병산의 솔숲에서 야영을 결행한 것은 소나무들의 씩씩한 모습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안면송으로 대표되는 서해안의 해송이 가늘고 길게 뻗어올라가 여성적이라면 동해안의 해송은 줄기와 가지가 튼실하고 두꺼워 남성적이다. 이날 밤은 바람이 몹시 불었는데 솔숲은 거의 완벽하게 바람을 막아줘 우리의 잠자리는 아늑했다.


● 맹추위, 추억의 국화빵 온기로 지우다

오전 10시 30분, 주문진에 도착했다. 동해안에서 손꼽히는 어항답게 주문진항은 자전거를 타고 통과하기 어려울 만큼 북적인다.

좌판에 생선을 펼쳐놓고 소리 높여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 주말을 맞아 타지에서 찾아온 관광객들까지 가세한 어시장 골목은 활기가 넘쳐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다.

복잡한 어시장을 빠져나와 선창가의 인적 드문 뒷골목으로 들어서던 허영만 대장이 갑자기 자전거를 세웠다. 허대장을 멈추게 한 것은 60대 노부부가 국화빵을 구워 파는 노점상.

밀가루 반죽이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와 달콤한 단팥 내음에 이끌린 것이다. 1000원에 4개짜리 국화빵과 달궈진 빵틀의 따스한 온기는 추위에 지친 자전거 나그네들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해안도로는 남애 부근부터 열악해졌다. 7번국도가 워낙 바다 쪽으로 붙어있는 탓에 중간 중간 어쩔 수 없이 자동차가 쌩생 달리는 국도를 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떡하든 7번 국도를 피하려 마을길이 보인다 싶으면 일단 들어가 본다.

그 동안 경험에 의하면 이럴 경우 보통은 좀 험한 길을 멀리 돌아가더라도 대개 길이 연결되기 마련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곳곳에 군사용 철조망이 설치되어있어 아예 통과 할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막힌 길을 만날 때마다 네비게이터 역할을 맡은 내게 대원들의 원망 섞인 눈길이 쏟아지곤 한다.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미심쩍을 때마다 지도를 확인하면 될 일이지만 수많은 갈림길에서 일일이 자전거를 멈추고 배낭을 벗고, 태블릿PC를 꺼내보는 것이 맘처럼 쉽지 않아 직관에 의지할 때가 더 많다.

결국 남애항과 기사문항 사이의 잔교마을에서 지도를 확인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7번국도 옆으로 한적한 마을길이 기세 좋게 뻗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번에도 직관을 믿고 핸들을 돌린 것이 동티가 됐다.

처음에 들어섰던 길이 해안 암석지대에 막혀 끊기자 우회해 마을 뒤 깨밭을 가로질렀으나 잡풀이 우거진 야산에서 길은 더 이상 흔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다시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야 옳았다.

그러나 야트막한 야산 넘어 7번국도가 빤히 보이는지라 호기롭게 직진을 결정했다. 자전거를 끌고 메고 10여분이 걸려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옷에 온통 달라붙은 도깨비바늘이었다. 길가에 자전거를 기대어 놓고 투덜거리며 한참동안 도깨비바늘은 떼어내야 했는데 워낙 많이 달라붙은지라 완벽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후 우리는 채 제거되지 않은 도깨비바늘때문에 사타구니와 오금이 따끔거려 애를 먹으며 제대로 라이딩을 할 수가 없었다. 도깨비바늘을 떼어내는 동안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7번 국도를 북상 중인 두 명의 라이더를 만났다.


양양 못미쳐 7번 국도를 피하려다 길을 잘못들어 결국 잡목숲을 헤쳐나오고 있다. 자동차도로를 기피하는 집단가출 전국일주에서 흔한 풍경 중 하나다.


단팥 내음에 멈춘 나그네 발걸음
국화빵 온기로 추위 지우고 다시 페달

잘 가는가 싶더니 “여기가 어디야!”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워낙 추운 날씨여서 어제부터 우리 말고는 자전거 여행자를 전혀 만나지 못한 터여서 반가운 마음에 물어보니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서울에서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와 강릉∼속초 구간을 달린 뒤 오늘 밤 다시 버스편으로 돌아갈 예정이란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기사문을 지나 하조대에서 우리는 두 사람과 헤어졌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7번 국도를 달리고 우리는 양양공항 동쪽으로 난 마을길을 택한 것이다.

점심을 거른 채 강릉∼양양 구간 60km를 달린 뒤 저녁 밥상을 마주한 허영만 화백. 막국수에 앞서 이 집의 간판 메뉴인 돼지고기 수육이 나왔다. 배추는 이진원 대원이 부식거리로 준비해온 것으로 아무 양념 없이 그냥 먹어도 될만큼 달콤했다.


● 속초 단양면옥…3대 저력 느낀 돼지수육·막국수

양양공항 동쪽 소로를 통해 수산항을 돌아 양양읍내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기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동안 17개월째 자전거를 타왔으니 어지간히 페달링에 적응이 됐으련만 맞바람을 뚫고 비포장길을 포함 60km를 달리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웠던 것이다.

게다가 아침 식사 이후 주문진에서 먹은 풀빵과 잔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엎어진 김에 쉬어가는 격으로 먹은 비스켓이 오늘 섭취한 열량의 전부였으니 허기도 극에 달했다.

속초의 지인이 추천한 단양면옥은 남문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골목에 숨어있었다. 강원도 양양에서 충북 단양의 지명을 상호로 쓴 것이 뜬금없어 사연을 물어보니 창업주 고씨 할머니가 단양 출신이란다. 멀리 이곳 양양까지 시집와서 막국수집을 차렸고 지금은 손녀가 맥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3대째인 셈이다.

강릉 이북 해안지역에는 실로암, 백촌, 산북 등 성수기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맛볼 수 있는 유명한 막국수집이 여럿 있지만 단양면옥은 비교적 덜 알려진 곳.

매콤한 양념 위에 김가루를 뿌려내는 것은 다른 막국수집과 비슷하지만 국수를 비비기 전에 살짝 넣는 육수 맛이 순하지만 깊어 뒷골목에 숨어서도 3대째 같은 메뉴를 이어올 수 있는 저력이 엿보인다.  막국수와 함께 주문한 돼지고기 수육이 이 집의 사실상 간판 메뉴인데 맛을 내기 위해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돼지고기 특유의 향을 가감 없이 드러낸 소박함이 강점이다. 점심을 건너 뛴 탓에 너무도 배가 고팠으므로 막국수와 수육을 그야말로 ‘흡입’했지만 그 와중에도 풍미가 느껴진다.

이제 양양까지 진출했으니 해안선 일주 종착점인 고성군 명파해변까지 남은 거리는 약 60km. 다음달 라이딩 때는 부디 봄 기운이 무르익어 가벼운 옷차림으로 달릴 수 있기를 바래본다.

글·사진|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동해안길이 단순하다고? 쉽게 봤다간 ‘큰 코’ 다쳐

입력 2012-03-06 07:00:00 

양양공항 인근의 해변도로. 군부대에서 설치한 철조망이 해변을 따라 설치되어있다.

■ 동해안 코스를 되돌아보며…

2010년 9월 강화도에서 시작된 집단 가출 자전거 전국 해안선 일주는 지난해 11월 울산 부근에서 2000km를 넘었고, 2월 현재 총 주행거리 2400km(제주도, 울릉도 일주 포함)를 기록 중이다.

코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자동차도로로 달렸다면 1200km쯤일 거리가 약 2배로 늘어난 것은 ‘가능한 자동차 도로를 피한다’는 집단 가출 멤버들간의 약속 때문이다. 산길, 마을뒤안길, 논둑길, 해변, 갯벌 등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라면 험로도 마다않고 코스를 이어가다보니 필연적으로 거리가 길어진 것이다.

해안선이 복잡한 서해안, 남해안에 비해 동해안은 해안선이 단순해 길 찾기도 수월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울산∼삼척 구간은 7번국도와 별도로 해안의 옛 마을길이 잘 발달되어있는 덕분에 경치도 좋고 호젓해 자전거로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으나 삼척 이북부터는 마을길 사정이 썩 좋지 않은 편이다.

해안선 일주의 마지막 구간이 될 양양∼고성(동일전망대) 코스도 지도를 살펴본 결과 불가피하게 7번국도로 올라가야하는 구간이 적지 않다.

동해안은 경치가 워낙 뛰어나 자전거도로를 따로 만들지 않고 7번국도를 피할 수 있도록 옛 마을길들만 연결해도 국내 최고의 자전거 여행 코스가 될 것이다.

[스포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