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등산,캠핑,기타자료/등산, 캠핑 지식

지리산, 어느 길로 만나시렵니까?

by 시리우스 하우스 2009. 12. 10.

 

지리산,어느 길로 만나시렵니까?

국민일보 | 입력 2009.12.10 17:40 |

 




한 해 350만명이 지리산을 찾는다. 밑에서부터 걸어 오르겠다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 차를 타고 정상 턱밑까지 간다. 지난해 161만명이 다녀갔다는 노고단. 노고단 바로 아래 성삼재에 대형 주차장이 있다. 승용차는 물론 관광버스들이 즐비하다. 성삼재에서 내린 등산객은 노고단까지 3.2㎞를 걷는다.

천왕봉도 마찬가지. 중산리까지 차로 오르고 거기서부터 8㎞를 걸어 천왕봉에 닿는다. 중산리-천왕봉 코스 이용자는 연 30만명이 넘는다. 국지모(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사무처장 윤주옥(43)씨는 "1970년대만 해도 천왕봉에 초록빛이 남아 있었다는데 지금은 풀 한 포기 없이 돌만 남았다"고 했다.

천은사에서 성삼재를 거쳐 남원시로 이어지는 861번 지방도로는 지리산 자연보존지구를 통과한다. 이 도로로 연간 80만대의 차량이 통행한다. 90%가 노고단 관광객. 피서철이나 단풍철이면 수천대가 동시에 몰린다. 성삼재 아래로 5㎞씩 차가 늘어선다. 매연 소음 로드킬 교통사고 등을 남기며 올라가는 길이다. 이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도 지리산 관광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례군 산동온천지구에는 적자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지리산 전체 관광객 숫자도 해마다 준다. 올 만한 사람은 다 온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온다.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이 길을 잃었다.

수직의 길, 케이블카

지리산의 활로와 관련해 유력한 대안으로 부상한 게 케이블카다. 전남 구례군(산동온천∼노고단), 전북 남원시(뱀사골∼반야봉, 정령치∼반야봉), 경남 산청군(중산리∼제석봉)과 함양군(백무동∼제석봉) 등에서 케이블카 건설 계획을 내놓은 상태. 걸어서 대여섯 시간 걸리는 노고단을 케이블카로 가면 30분 만에 닿을 수 있다. 하이힐 신고 정상을 밟을 수도 있다. 케이블카가 지리산을 즐기는 가장 빠르고 편리한 방법이 될 거라는 건 분명하다.

구례군케이블카추진위원회 김영의(62) 위원장은 "노고단 케이블카는 구례군의 20년 숙원사업"이라며 "케이블카가 생기면 외국인까지 유인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구례군은 케이블카 기점인 산동온천지구에 골프장 연수원 예술인마을 수목원 컨벤션센터 등을 유치해 관광레저특구로 조성, 구례군을 내륙관광 거점으로 키운다는 구상도 세워놓았다. 케이블카추진팀까지 만든 산청군청은 케이블카로 관광객이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김 위원장은 "우리나라에서 케이블카가 제일 잘 운영되는 곳이 경남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인데, 운행이 며칠 중단되자 통영 경제가 바다에 가라앉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며 "10년간 극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케이블카를 연장하자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지역경제 살리기는 케이블카 추진 논리의 핵심이다. 여기에 노약자와 장애인에게 명산을 감상할 기회를 주고, 등산이 어려운 겨울철에도 산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명분이 가세한다. 흥미로운 것은 근래 환경논리가 추가됐다는 점이다.

산청군청에 근무하는 오무세(44) 계장은 "걸어서 가는 게 환경훼손이 심하겠느냐? 공중으로 가는 게 심하겠느냐?"며 "등산로 훼손을 막으려면 케이블카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케이블카가 환경훼손물이라는 생각은 국제적으로 보면 이미 낡은 생각"이라며 "호주에서는 환경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케이블카 운영업체에 상을 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구례군청 서한봉(50) 계장 역시 "환경을 살리기 위한 케이블카"라고 강조했다. 서 계장은 "지리산을 통과하는 861번 도로의 환경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통과도로의 폐쇄 혹은 제한에 동의한다면 환경단체들도 구례군을 밀어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환경단체들은 케이블카가 생긴다고 등산로로 오르는 사람이 줄어들지, 지방자치단체 간 이해관계가 중첩된 지리산 통과도로의 폐쇄가 가능할지, 케이블카 기점부와 종점부의 환경파괴를 막을 수 있을지 등에 의문을 던지면서 케이블카 설치를 막아서고 있다.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운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하나가 뚫리면 다 뚫린다'는 위기감이다. 노고단 산상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김광철(41) 수평교회(구례군) 목사는 "지리산에 케이블카가 하나라도 올라간다면, 그것은 하나의 케이블카로 끝나지 않는다"며 "지리산에 제2, 제3의 케이블카가 올라갈 것이고, 강원도 설악산 케이블카, 제주도 한라산 케이블카도 막을 도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수평의 길, 둘레길

지리산 밑자락 주민들이 사는 마을에는 도보여행코스가 만들어지고 있다. 지리산을 옆으로 도는 '둘레길'이다. 지난해 4월 시범구간에 이어 올해 4개 구간을 개통해 5개 구간 70㎞가 열린 상태. 새로 길을 닦는 건 아니고 옛길과 산길을 복원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방식으로 길을 만들어 나간다. 둘레길을 만드는 사단법인 숲길 이상윤(46) 상임이사는 "국립공원을 침범하지 않는 마을들을 연결해 걷는 길을 만들고 여기에 순례라는 의미를 담아 지리산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레길은 지리산권 경제를 살리는 방법이 꼭 케이블카만은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둘레길 출발지로 널리 알려진 전북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은 좋은 사례다. 이 마을 이장 이영수(72)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말로 둘레길이 불러온 변화를 표현했다. 65가구로 구성된 매동마을은 지난달 28일 토요일 하룻밤에 6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둘레길 여행객을 상대로 한 농가민박과 농산물 판매를 통해 번 돈이다. 매동마을의 11월 한 달 수입은 4000만원.

이씨는 "불편할 텐데 왜 민박을 찾느냐고 여행객들에게 물어보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을 느끼고 옛날부터 살아오던 모습을 경험하기 위해 왔다고들 한다"며 "밤이 되면 적막강산이던 우리 마을에 토요일 일요일마다 불이 훤하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골목길을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매동마을 같은 성공 사례는 아직 많지 않다. 지난해 3만명으로 추정되는 둘레길 여행객이 올해 얼마나 늘었는지 집계도 안 된다. 남원시 인월면이나 산내면처럼 여행객이 많이 지나는 동네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얘기 정도가 흘러나올 뿐이다.

남원시는 최근 시장 주재로 둘레길 이장 모임을 열었다. 터미널과 역에서 둘레길에 곧바로 연결되도록 버스 노선을 정비하기도 했다. 그런 남원시도 케이블카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 환경문제와 경제문제가 뒤엉킨 지리산에서 둘레길은 아직 듬직한 대안이 못 되는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가치관의 대결

지리산에 케이블카가 들어설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환경부는 지리산과 설악산에 1개 이상의 케이블카를 허가할 방침임을 지난해부터 시사해 왔다. 지난 5월 환경부가 케이블카 설치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을 담아 입법예고한 자연공원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면 법적 문제도 사라진다. 지역 여론도 케이블카에 우호적이다. 둘레길은 2011년까지 총 300㎞로 완결된다. 현재 남원시와 함양군 노선이 열렸지만 앞으로 구례군 하동군 산청군 등 지리산 권역 전체로 확대된다. 300㎞를 다 걸으려면 26일이 걸린다. 국내 최장 도보여행길이다. 둘레길 사업 예산은 100억원. 노고단 케이블카 설치비용은 450억원이다.

지리산에 두 갈래 새로운 길이 준비되고 있다. 케이블카는 현대적 길이다. 빠르고 편하고 대중적이다. 둘레길은 오래된 길이다. 느리고 불편하고 마니아적이다. 케이블카가 사람들을 산 정상으로 인도한다면, 둘레길은 정상에 가려는 사람들을 산 밑으로 유인한다. 케이블카는 산 정상을 밟고자 하는 인간 욕망을 인정하지만, 둘레길은 그 욕망을 단념시키려고 한다.

관광객 집객 효과로만 보자면 케이블카는 블록버스터, 둘레길은 독립영화다. 둘레길의 경제 효과를 인정하지만 지역경제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자체들의 일치된 시각도 여기서 나온다.

둘레길 만드는 사람들은 기준을 바꿔보자고 주장한다. '빠른 관광' 대 '느린 관광', '보고 떠나는 관광' 대 '체험하고 머무는 관광', '한 번 오고 다시 안 오는 관광' 대 '한 번 오면 또 오는 관광', 이런 식으로 기준을 정립하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의 미래를 놓고 벌이는 케이블카와 둘레길의 대결은 단순히 길의 문제가 아니다. 관광 패러다임의 대결이고, 지역개발 정책의 대결이고, 또 지리산 정체성의 대결이다. 이것은 지리산에서만 벌어지는 대결도 아니다. 강에서, 댐에서, 도로에서, 전국 어디서나 벌어지는 대결이다. 이것은 '가치전쟁'이다. 당신은 어느 길로 지리산을 만나겠는가?

구례(전남)=임항 환경전문기자·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 goodnewspaper ⓒ 국민일보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