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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전 거 /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11. 해남~보성 <하>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0. 19.

 

11. 해남~보성 <하>

■ 못생겨도 맛있어! 보성 ‘득량냉면’

신지도 명사십리 찾아가는 길    
헉헉 아찔한 고갯길 이글이글 태양    
심장은 고동치고 근육은 파열직전    

“허화백, 괘…괜찮으세요?”
“마…말 걸지마…히…힘들어”


완도와 다리로 연결된 신지도는 아름답기로 근동에서 소문난 명사십리 해변이 자리 잡은 곳으로 여름철 피서객들에겐 꿈의 섬이다.

대개 관광지의 지명에는 약간의 과장이 섞여있게 마련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해변에 ‘XX십리(10里)’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실제로 10리를 꽉 채운 경우는 거의 없다. 1리가 약 400m이므로 10리면 4km.

이에 비해 신지도 명사십리는 섬의 남쪽을 향해 열린 해변의 길이가 약 3.8km에 달해 10리에 근접해있다. 물이 깨끗하고 모래도 고와 해마다 여름이면 피 끓는 젊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 ‘명사십리’ 신지도는 고난의 섬?

하지만 집단가출 자전거 나그네들에게 신지도는 고난의 섬이었다. 섬 전체가 험준한 산악지형인 탓에 높은 고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글거리는 남도의 땡볕 아래 고갯길을 넘을 때 허벅지 근육은 터질 듯 부풀었고, 심장과 폐는 한계치의 RPM으로 요동치는데 한 구비를 넘어 잠시 숨을 돌릴라치면 어느새 또 하나의 고개가 나타나 질릴 지경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명사십리 해변이 있는 대곡리(한들)에 들어서자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 펼쳐져 한시름 놓는가 싶었으나 앞을 보니 아찔한 높이의 산이 버티고 있다.

우리는 보통 업힐(Up Hill)을 할 때 뒷바퀴 변속기어 중 가장 큰 톱니는 최후의 순간을 위해 가능하면 아껴둬 왔다. 최고 큰 톱니에 체인을 걸면 당연히 편하지만 자전거에서 변속감(感)이란 것이 꽤나 상대적이어서, 더 이상 페달을 돌릴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사용하지 않아온 것이다. 이는 몹시 힘들 때 히든카드로 꺼내들 수 있는 마지막 한 장의 기어가 더 남아있다는 심리적 보루를 제공하는 기능도 겸하고 있다.

그런데 신지도 대곡리에서 신상리로 통하는 가파르고 긴 고갯길은 초장부터 최후의 기어를 요구했다. 꾹꾹 누르듯 페달을 밟으며 앞서가다 최연장자인 허영만 대장이 문득 걱정되어 돌아보니 그 역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괘... 괜찮으세요?”

“마... 말 걸지마... 히... 힘들어.”

사실 고갯길에서 너무 힘들면 자전거에서 내려 끌바(바이크를 끌고 간다는 뜻의 자전거 동호인들 사이의 은어)로 천천히 걸어도 된다. 하지만 일단 자전거에 올라앉으면 반드시 타고 오르고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다 집어치우고 내려서 걷자는 자아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자아가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 싸움에서 이겨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희열은 자전거의 즐거움 중 최고가 아닐까 싶다.

● 해발 723m 강진 천관산 냇물에 풍덩

고갯마루에서 오체투지를 하다시피 올라온, 구비진 길을 내려다보며 느끼는 성취감도 자전거가 아니면 느낄 수 없을 터. 신상리에서 신문기사를 통해 우리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준비한 시원한 수박을 먹을 때는 온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수박으로 기운을 차린 뒤 야영지로 점찍은 동고리까지 가는데도 여지없이 고갯길은 우리를 괴롭혔다. 하지만 더 괴로웠던 것은 인터넷을 통해 아름답고 한적한 해변으로 알려진 아무개 해변이 막상 가보니 온갖 바다 쓰레기로 오염되어 도저히 밤을 보낼 수 없는 장소였다는 점이었다. 하는 수없이 수박을 얻어먹었던 신상리 마을 정자로 향하는 길은 씁쓸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첫 도선을 타고 고금도로 건너가 마량 다리를 건너 강진을 향한다. 대한민국 남쪽 해안이 서해나 동해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아름다운 것은 해안선이 복잡해 곳곳에 비경이 숨어있는데다 해안 가까이까지 높은 산들이 바짝 붙어 있기 때문이다.

어제 지나온 해남에 달마산 두륜산이 있다면 강진은 오봉산, 장흥은 도립공원 천관산이 솟아있다. 그러고 보니 호남이 미식의 땅이 된 것은 바다와 산, 평야가 적절히 분포돼있어 그야말로 산해진미의 식재료가 사시사철 넘쳐나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신지도 대곡리에서 신상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갯길의 정상부에서 대원들이 득의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왼쪽부터 허영만 김승정 김경민 정상욱 송철웅 홍순영. 여고생인 김승정은 다음달 뉴욕 SCHOOL OF ARTS 진학을 앞두고 고국에서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게스트로 참가했는데, 엄청난 주력으로 기존 멤버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사진|홍석민


천관산 접어들자 시원한 냇물 소리
자전거도 체면도 팽개치고 풍덩

40분 기다려 맛본 7,8월 한정판 냉면
시원한 육수에 메밀향도 수준급
캬∼ 주방장 내공에 감탄사만 연발

해발 723m의 천관산은 사방의 골짜기로 맑고 차가운 물을 콸콸 쏟아내는데 햇볕에 달아오른 자전거 나그네들로서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장흥 관산리 삼산읍을 지날 때 천관산에서 삼산들녘으로 흘러드는 냇물을 보자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기어이 자전거도 체면도 팽개치고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에 몸이 닿자 마치 대장간에서 달궈진 쇠가 ‘치지직’ 소리를 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보성을 향하는 2번 지방도에서 2명의 자전거 여행객을 만났다. 26세 동갑나기 예비역 대학생인 김주환, 한물결 씨는 부산 출신. 지난달 방학과 함께 부산을 떠나 동해안을 북상한 뒤 서해안을 돌고 이제 남해안을 따라 고향 부산을 향하는 중이라고 한다. 벌써 20일을 자전거를 타고 길 위에서 보낸 두 젊은이는 흑인처럼 검게 그을린 채 수염까지 텁수룩해, 비록 주행거리는 길지만 매달 한번씩 끊어서 전국을 일주중인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전남 보성 득량 냉면의 위용. 보기엔 촌스러웠지만 깊고 뛰어난 맛은 ‘집단가출 팀’의 감탄을 자아냈다.


● 보성 바닷가 7,8월 한정판 득량 냉면

김주환 한물결 씨와 헤어진 뒤 보성 율포까지 진출한 우리들은 다음날 고흥의 입구인 득량만의 겨드랑이를 겨누고 새벽길을 떠났다.

새벽에 길을 나선 것은 조금이라도 덜 더울 때 주행거리를 늘리기 위함이었으나 야속하게도 볕은 오전 7시쯤부터 이미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군농, 서당, 비봉을 거치는 보성해안도로는 바람이 시원했고 찬란하게 아름답다.

남도의 해안은 대부분 생활의 현장이지 관광지가 아니어서 식사할 곳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가뭄에 콩나듯 만나는 마을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득량면 소재지까지는 가야 식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미식의 고장 호남에서 식당을 못 만나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어이없었지만 별 수 없이 뜨거운 햇살 아래 끝없는 페달링. 정오를 넘겨 도착한 득량면은 전라선 득량역을 중심으로 면사무소와 농협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에 유일한 식당이 송죽식당. 식당이 하나밖에 없다는 얘기는 이 식당의 음식 수준을 보장할 수 없다는 얘기와 같다. 인근에 경쟁 상대가 없는 단 하나의 식당이니 굳이 맛있게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랴, 달리 밥 얻어먹을 곳이 없는데….

하지만 식당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분위기가 심상찮다. 주방에서는 메밀면을 뽑는 기계가 가마솥에 쉴 새 없이 면을 쏟아내고 있었고, 2명의 손 빠른 아주머니가 찐계란, 무절임 등 고명을 던지듯 얹어 척척 내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냉면.

서빙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청년에게 이 집에서는 육수도 직접 만드느냐고 물어보니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그라재라우”한다.

20여분을 기다려 겨우 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으니 제초작업을 하다온 듯한 옆 테이블 농부들이 자기들은 이미 50분을 기다렸다며 안됐다는 눈길을 보낸다. 냉면은 40분 만에 나왔다. 찐계란, 쇠고기 수육 외에 노란 계란지단과 빨간 수박이 고명으로 얹혀진 모습이 서울 을밀대나 우래옥의 깔끔한 냉면 모습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불안했으나 국물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누군가 큰소리로 심벌즈를 치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단정하면서도 우묵하고 깊은 맛. 메밀 사리도 적절한 점도와 메밀향이 수준급이다. 집을 떠나 멀고먼 남도의 보성 바닷가 마을에서 이런 냉면을 만난 것은 뜻밖이어서 감동이 밀려든다. 사리를 추가로 주문하자 우리가 허기졌다는 것을 눈치 챈 서빙 청년이 큼직한 뭉치의 사리와 함께 찐계란까지 가져다준다.

이날 보성 득량 냉면은 발군의 맛과 함께 호남의 푸근한 인심까지 보여주며 나그네들에게 깊은 위로와 안도감을 선사한 서프라이즈 음식이었다. 안타깝게도 송죽식당의 냉면은 연중 7,8월 단 두 달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하기야 나머지 시즌에 낙지요리, 한우요리, 생선요리가 즐비할 터이니 굳이 냉면 메뉴를 계속 유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냉면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이 집 음식의 수준 높은 내공이 다른 메뉴에서는 어떻게 발휘될지 궁금해 다음달 이곳에서 자전거를 또 다시 출발할 때 다시 한번 들르기로 한다.

함흥냉면 vs 평양냉면, 당신의 선택은?

입력 2011-08-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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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부산을 출발해 조국 땅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진짜배기 전국일주 중인 김주환(왼쪽에서 두번째), 한물결 씨(왼쪽 끝)를 보성에서 만났다. 서로의 앞길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의미에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사진|홍순영

더위가 최고조에 달한 요즘, 전국 어디서나 냉면은 인기메뉴다.

우리나라 냉면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모두 북한 지역이 원조다. 함경도 지방에서 발달한 함흥냉면은 면을 만드는 재료가 감자녹말.

면이 얇고 질기다 싶을 만큼 끈기가 있는데 가자미나 홍어 등 물렁뼈가 발달한 생선을 회로 만들어 얹고 고추장으로 양념해 비벼먹는다.

냉면의 양대 산맥 중 또 다른 하나는 평양냉면으로 메밀가루로 만든 면을 대접에 담아, 편육 ·쇠고기 볶음 ·오이채 ·배채 ·삶은 달걀 등의 고명을 얹어낸다.

평양냉면은 함흥냉면과는 달리 육수를 쓰는데 쇠고기 ·닭고기 ·꿩고기로 만든 육수나 동치미국물을 차게 해서 식초와 겨자를 곁들인다. 냉면은 양념이 절제된 음식이어서 만드는 이의 실력에 따라 맛 차이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보성 득량에서 만난 냉면은 평양식.

영화 ‘식객’에서 라면 고수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맛있는 라면의 비법을 찾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라면 고수는 “사나흘 굶은 다음에 끓여보라”고 말한다. 배고프면 뭐든 맛있다는 얘기.

자전거 식객들은 보성 득량 냉면을 먹기 전에 몹시 허기지고 더웠다. 뭐라도 시원한 음식이 맛있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 하지만 먹고 나서도 가슴에 여운을 남기는 냉면이 대한민국에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허영만이 그린 한 컷 풍경

입력 2011-08-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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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도 명사십리는 너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지라 호젓하게 바이크캠핑을 할만한 조용하고 작은 해변을 물색하다 고개를 두개나 넘어 찾아간 OOO해변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10여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아름다움은 간 곳 없고 폐 그물, 스티로폼 부이 등 버려진 폐 어구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모래 자체가 백사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만큼 빈약해졌다는 점. 짐작컨대 바다 쪽으로 길게 머리를 내민 방파제 겸 선착장과 새로 만든 마을길이 해안과 층이 높게 져있어 자연적으로 쌓여오던 모래가 더 이상 공급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명사십리도 해안을 빙 둘러 콘크리트 제방을 만들었다가 모래가 다 쓸려나가자 비용을 들여 다시 철거한 바 있다. 아름다운 자연은 그대로 놓아둘 때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삽화=허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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