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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악/클래식

일그러진 진주의 미 바로크 음악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0. 4. 13.

 

바로크 음악은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의 유럽음악의 사조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로크란 말은

어디서 왔을까. 검색창에 ‘바로크’를 치니 ‘바로크 진주’가 나온다. ‘바로크 진주’를 클릭하니 이런 글이 나온다.

“과거에 바로크 진주는 그 울퉁불퉁한 형태로 인해 값싼 상품으로 여겨져 시장을 찾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려지곤 했다. 하지만 바로크 진주를 내다 버렸던 사람들은 이를 다시 찾고 싶어질 것이다. 바로크 진주가

귀한 상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패션을 앞서가는 소비자들은 새삼 바로크 진주의 천연의 형태와 사이즈,

 즉 그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일그러진 진주’를 의미하는 ‘바로크 진주’는 지금도 보석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원래 미술에서의

용어였던 ‘바로크’는 이러한 울퉁불퉁한 진주를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에서 왔다.

바로크 시대의 장식적인 건축 양식이나 회화에 대해서 균형과 조화를 존중한 18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자들이

풍자의 뜻으로 한 말이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균정하고 고전적인 성격이 바로크 시대에 불균형한

것으로 타락했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일그러진’, ‘과장된’, ‘꼴사나운’ 등의 의미로 일컬었던 말이었다.

오늘날 미술사에서 바로크는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움직임이 풍부하고 감정의 드러냄이 많은

회화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음악에 있어서도 1920년대 ‘바로크’란 표현이 처음 음악사에 사용됐을 때

용어 자체에 있었던 모멸적이나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난 뒤였다.

 

 

 

오페라의 탄생과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죽음


이러한 바로크 음악의 처음과 끝은 음악사에서 굵직한 사건들로 매듭지어져 있다. 하나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죽음이다. 먼저 바로크 시대의 첫 장을 연 1600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탄생했다. 야코포 페리와 줄리오 카치니가 공동 작곡한 [에우리디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이다.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명문 메디치 가의 마리아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상연되었다.


오페라, 이 극과 음악의 결합 양식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음악이 결합하면 연극의 효과는 배가됐다. 중세에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을 축하하는 전례극이 성행했고, 수도원이나 학교에서도 합창과 노래를 함께 하는 학예회 풍의 공연이 성행했다. 극음악이 함께하는 연극과 음악이 함께 하는 목가극도 남아있었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까지 음악은 대부분 여러 성부를 기본으로 만들어져 한 사람의 대사도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불렀다. 때문에 듣고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극과 음악의 결합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거기에 앞장섰던 것은 예술과 문예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귀족 중심의 아카데믹한 서클이었다. 이들은 활발히 정보를 교환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이들 서클 중 하나로 피렌체에 있었던 것이 ‘카메라타’였다. 피렌체의 유복하고 교양있는 귀족, 철학자,

화가, 음악가, 시인들이 모인 동호회였다. 이들은 연극의 부흥과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함께 추구하고 있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고대 그리스의 키타라 반주 독창을 연구하고 모방했다. 이들이 연구한 그리스의

문헌에서는 말과 음악의 일치를 반복해서 역설하고 있었으며, 그것이야 말로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여럿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하나의 소리로 노래하는 가창 스타일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런 스타일을 ‘모노디(모노디아)’라고 한다. 멜로디가 음악의 중심이 되고, 그것을 반주하는 하모니가 있고,

가사의 의미가 잘 전달되도록 작곡하는 것이 바로 이 모노디 스타일이다. 우리가 들어온 대중가요의 양식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단일’을 뜻하는 ‘monos'와 ’노래하다‘를 뜻하는 ’aidein' 등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말인데, 모노디 양식은 지배적이었던 다성음악에 종말을 알리고 클래식 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전 시대와 견주어 볼 때 단선율로 이루어진 독창 형식이 발달하면서 특히 오페라 분야에

큰 발전이 있었고, 이러한 특징이 나중에 고전주의 양식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오페라를 계승한 작곡가는 몬테베르디였다. 그의 [오르페오]는 1607년 만토바 공의 생일날

그의 궁정에서 무대에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다. 몬테베르디는 초기 오페라, 바로크 오페라의

작곡가로 기억될 만하다. [오르페오]를 비롯해서 [율리시즈의 귀환], [포페아의 대관] 등 그의 작품은

요즘도 심심찮게 무대에 오른다. 당시에 이들 작품이 무대에 오르던 오페라 극장은 베네치아에 있었다.

베네치아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으로도 알 수 있듯이 해상 수송의 거점으로 발달한

상업도시였다. 교황과 성직자, 그리고 왕후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로마나 피렌체라면,

베네치아는 상인의 도시였던 것이다.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의 음악


1600년 피렌체에서 시작된 오페라는 처음에는 왕후나 귀족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1630년경에는 로마가 오페라의 중심지였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상연시기가 제한되거나 상연 레퍼토리가 규제를 받아서 작곡가들은 로마를 떠나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헤게모니는 엄청난 재력을 소유한 상인들이 좌우하는 베네치아로 옮겨졌다. 1637년 베네치아에서는 최초로 시민을 위한 공개 오페라 극장이 만들어졌다. 오페라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일반 시민의 오락으로 정착해갔다. 17세기 말에는 크고 작은 극장이 십수 개 만들어졌다. 오페라 극장에는 높은 곳에 위치한 관람석과 무대 정면 바닥 관람석이 마련돼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관람석에는 대개 귀족이나 부유한 시민들이 앉았고, 바닥 관람석에는 좌석이 아예 없었다. 이 당시의 오페라는 역사나 신화, 우화적인 제재를 테마로 하여 그것에 코믹한 에피소드를 가미한 것이 많았다. 유절형식, 론도 형식, 다 카포 아리아 등 아리아의 형식이 많아졌고,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형식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규모의 기계장치를 한 화려한 무대장치 등이 이 시기 오페라의 특징이었다.

 

1624년 베네치아에서 상연된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은 새로운 기악의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그는 분노나 흥분의 기분을 표현하기 위하여 급속히 반복되는 현의 트레몰로를 써서 새로운 양식의 음악적인 표현법을 개척하였다.






 

큰 무대장치가 볼만했던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은 차츰 기업화되어 흥행과 채산성을 고려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비용이 많이 드는 코러스는 축소되어 갔다. 오페라의 초기 작품은 그리스 비극에서 유래한

것들이 많았는데, 오페라 담당자가 일반 시민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아무래도 대중적인 요소와 희극적인

요소도 조금씩 가미되게 되었다. 음악도 뱃노래 리듬과 독창 가수를 두드러지게 내세우는 정감 넘치는

멜로디가 인기를 끌었다. ‘파리넬리’로 잘 알려진 거세된 남성 가수 카스트라토가 기용되어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이 시기였다.

 

18세기 초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지는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옮겨졌다. 수려한 자연 경관을

지니고 바람이 맑고 아름다운 나폴리에서는 일상적인 모습을 그린 희극적인 성격의 오페라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바로 ‘오페라 부파’이며 기존의 고전적이고 비극적인 주제가 중심인

정통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라고 하여 구별한다.

 

 

 

유럽 ‘바로크 리그’의 사정


세리에 A, 르 샹피오나, 프리미어 리그, 분데스리가. 그렇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의 축구 리그이다. 이 유럽의 유명한 축구 리그는 바로크 시대의 상황과 비슷하다. 이 유럽 바로크 리그를 정리해 보자. 먼저 요즘의 축구 리그와는 다른 점이지만 바로크 시대 당시 최고의 음악 선진국은 이탈리아였다. 가브리엘리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치아 악파의 협주양식이나 앞서 언급한 페리, 카치니의 모노디 양식 오페라가 선구를 이루었다. 로마 및 베네치아 악파를 거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등의 나폴리파에 와서는 벨 칸토 창법으로 독특한 기교를 과시하는 명가수 중심의 오페라로 진화했다.

 

1730년대에는 서정적인 비극을 테마로 하는 오페라 세리아와 코믹한 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오페라 부파 등 2개의 스타일이 뚜렷이 분리하게 되었다. 또한 모노디 양식에서 종교적인 제재를 다루는 칸타타오라토리오가 작곡가 카리시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기악 면에서는 트리오 소나타, 교회 소나타, 실내 소나타, 그리고 주로 바이올린 주법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합주 협주곡, 독주 협주곡의 형식이 생겨났다.



 

루이 13세로부터 15세에 이르는 절대주의 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번영하던 프랑스는1720~1730년에

걸친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의 갤런트(갈랑) 양식이 두드러졌으며 장중한 표현을 지닌 륄리라모 등의

오페라, 쿠프랭 등 클라브생(쳄발로 혹은 하프시코드) 악파 등이 현저한 발전을 보였다. 영국에서는

17세기 초인 엘리자베스 시대의 버지널 음악이 인기를 끌었고 왕정복고 후에는 헨리 퍼셀 등이 앤섬,

오페라, 마스크 등의 국민적인 양식을 낳았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헨델이 오라토리오의 전통을 이룩하였다.

독일에서는 초기 바로크가 네덜란드의 폴리포니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베네치아의 복합창 양식,

모노디 양식을 융합시켜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전통을 세웠으며, 모테트, 오라토리오, 수난곡,

코랄 등에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텔레만, 헨델, 바흐 등 거장이 잇달아

등장하였고, 바로크 음악을 절대적인 위치로 이끄는 데 공헌했다.


바로크 음악의 큰 특징은 음악으로 이념과 감정을 표현하고 재현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당시 작곡가들은 17세기 철학을 대표한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음악은 ‘분명한 이념’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이외에도 발전을 보인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 성악곡과

바이올린 작품 등 기악곡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관련링크 : 통합검색 결과 보기

 

 

 

류태형 / 전 <객석> 편집장, 음악 칼럼니스트
월간 <객석> 편집장 역임, 현재 (재)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 신윤주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KBS 클래식 FM [출발 FM과 함께] 중 '류태형의 출발 퀴즈' 코너를 통해
매일 아침 8시 출근길 청취자들과 만남을 갖는다. 거장들의 옛 음반과 생생한 공연의
현장이 반복되는 삶이 마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TOPIC / 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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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르치 (woon****) 2010.04.10 14:37

    이거 재밌네요. 이런 활발한 논쟁거리가 있어야 댓글 다는 맛이 나지요. 저도 음악에 대하여 아는 바는 적으나 첼시샬케님이 음악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그의 주장에 일정부분 옳은 점이 엿보입니다. 아무튼 재밌습니다.

  • 톰아쓰 (thom****) 2010.04.08 00:50

    자신의 아이디 뒤에 '님'을 붙여놓으니 사람들이 할수없이 님님 붙여서 부르게 되네.. 참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마치 존경스러워서 님을 붙이는것 같은 희한한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그 겸손한 얼굴 좀 보고 싶다. 치기어린 걸 보면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데... 류칼럼니스트님 여기 정화좀 시켜주세요. 부탁드려요.

  • 보카치오 (bocc****) 2010.04.06 09:42

    "첼시샬케님"은 실제로는 음악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며 음악에 대해 관심도 없는, 글자 그대로 인터넷에서 주워모은 지식을 가지고 어줍잖게 아는척하면서 의도적으로 다른 이들의 신경을 거슬리는 댓글을 싸지르는 것에 변태적인 쾌감을 느끼는 (디씨 코갤러와 같은) 부류임에 분명합니다. 그냥 옆의 "신고"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 미인 (corn****) 2010.04.06 01:29

    지나가다가 한마디 남깁니다. 누구나 음악을 들음에 취향이 있기마련이고 듣다보면 계보학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두둔하기 위해 또다른 무언가를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얕게 알면 알수록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배제하고 아는 부분에만 근거해서 추론을 하게 되는데요. 첼시사케님의 논리가 지금 그정도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비발디가 민요를 차용하고 바흐가 비발디를 채보한 것은 말씀하신것과 다르게 당시의 관행이였고, 이를 토대로 다른 음악을 만들어가는 발전의 과정이였으니까요. 그것이 단순히 잘하고 못하고, 위대하고 저급하고의 차이는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조화의 영감을 받아 들이신다면, 더 좋은 음악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 논트로포 (woo8****) 2010.04.05 20:07

    베토벤 대단하단거 누가 모르냐고 ㅜㅜ

  • 논트로포 (woo8****) 2010.04.05 19:56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무개념초짜니까 상대하지 맙시다. 우리가 졌다 첼시샬케↓

  • 첼시샬케님 (gojo****) 2010.04.05 11:53

    루드비히 반 베토벤은 시간의 시험을 이겨낼 필요가 전혀 없었죠 헨델이나 하이든같은 경우 죽고나서 급격히 위상이 쇠약해졌고 현재도 쇠약해진 상태에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요 모차르트는 말년에 위상이 떨어진 상태였음은 다 알테고 슈베르트는 생전에 빛을 본적이 없습니다 바흐는 잊혀졌다 다시 빛을 본거고 텔레만이나 살리에리는 생전에는 최고인기였으나 사라졌죠 루드비히 반 베토벤만은 그러한 상승과 추락없이 항상 최고의 자리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인거다 알긋나 2

    • 논트로포 (woo8****) 2010.04.05 20:00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무개념초짜니까 상대하지 맙시다. 우리가 졌다 첼시샬케↑

    • 스페르치 (woon****) 2010.04.10 14:39

      첼시샬케님의 주장 전개는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베토벤이 높이 평가한 작곡가들을 깎아 내리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베토벤을 다른 작곡가들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작곡가들의 수준이 현저하게 낮아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베토벤까지 깎아내리는 꼴입니다.

  • 보카치오 (bocc****) 2010.04.05 11:05

    아직도 "브람홀"이나 "첼시샬케님"의 댓글에 일일이 진지하고 심각하게 대응하는 분들이 있다니 좀 놀랍습니다. 쟤들은 정말로 음악에 대해서 무언가를 아는 게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주워들은 어줍잖은 지식을 가지고 남의 신경을 긁어대는 댓글들을 여기저기 싸지르면서 사람들이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를 즐기는 (디씨 코갤러와 동일한) 부류들입니다. 낚이지 마시고 그냥 무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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