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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전 거 /허영만의 '자전거 식객'

6. 광천∼서천 <상>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0. 19.

 

6. 광천∼서천 <상>

충남 태안군 이원면 미화식관의 백반 상차림. 돼지고기 김치찌개, 토장국을 위시해 킬집을 넣어 소금간을 한 꽁치구이와 아삭한 오이무침이 입맛을 돋웠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날 밥상에 오른 반찬의 지존은 코숭어젓갈. 뼈가 거의 삭아 뜨거운 밥에 비벼먹어도 맛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지 싶다.

조금만 더 가면 호젓하고 좋은 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갈수록 깊어지는 뻘밭을 허우적대며 달리는 동안 점점 더 절망으로 바뀌어갔다.

자전거 바퀴가 뻘에 박혀 기어비를 끝까지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페달링을 하면서 끙끙 소리가 절로 나왔고 균형을 잡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속도를 확보하기조차 어렵다.

태안 청산리는 감태 말리기 한창
자전거를 멈추고 한 입 맛보기
입속 가득 번지는 달콤쌉쌀 해초향
그 힘으로 다시 페달을 밟는다

박속낙지탕 포기하고 찾은 백반집
곰삭은 젓갈 냄새가 먼저 반긴다
넉넉한 찌개에 감칠맛 코숭어 젓갈
숟가락질은 멈출 줄을 모르고…


게다가 눈덩이가 구르며 커지듯 찐득한 뻘이 바퀴에 달라붙어 자전거는 마치 논을 갈고 있는 트랙터처럼 변해갔다. 바퀴에 붙은 두 삽 분량의 진흙 때문에 우리의 라이딩 모습은 똥 덩어리를 굴려가는 쇠똥구리와 다를 바 없었다.

자전거 식객의 제6차 투어 태안반도 구간은 초반부터 문자 그대로 진흙밭의 개싸움, 이전투구였다. 태안반도의 북쪽 돌출부와 서산 본토 사이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가로림만을 끼고돌다 바닷가로 내려선 것이 고생의 시작이었다. 우리를 뻘밭으로 끌어들인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봄기운이었다.

지난 달 지독한 추위에 시달린 뒤끝이어서 먼 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봄바람은 감미로웠고, 그 봄바람에 취해 자동차는커녕 사람 지나간 흔적도 없는 해변으로 자전거를 몰고 들어간 것이다.

자전거는 페달링을 멈추면 넘어지고 만다. 이미 진흙투성이가 된 자전거야 그렇다 쳐도 신발과 옷까지 포기할 수 없어 안간힘을 쓰며 속도를 내보지만 가로림만의 길고 긴 뻘밭은 좀처럼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달리는 와중에도 봄바다의 풍경은 가슴을 친다. 봄은 바다로부터 자욱한 해무(海霧)와 함께 밀려와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었고, 썰물이 빠져나가다 갇힌 갯벌 가운데 웅덩이에는 고니 몇 마리가 풍경화처럼 떠 있었다.

양지바른 야산 아래 만들어진 청산리의 감태 건조장. 싱싱한 이끼를 닮은 감태의 연초록빛이 싱그럽다. 감태김은 한장 한장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져 맛도 맛이려니와 그 정성이 감동이다.


# 한시간 반 뻘밭 사투에 기진맥진…혀 끝에 녹아드는 감태로 달래

삭선리에서 시작된 바닷가 수렁길은 한 시간 반이 지나 칙대미골, 성주산골을 지나 청산리에 도착해서야 도로를 만나 끝났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비탈진 마늘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이 혀를 끌끌 찬다.

“아니, 자전거로 대체 어딜 돌아댕겼길래 그 모냥이랴?”

자전거와 신발은 차라리 진흙덩이에 가까웠고 얼굴과 바짓가랑이 여기저기에도 뻘이 잔뜩 묻어있어 볼썽사나웠던 것이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궁금한 것들을 다 물어본 뒤 할머니는 감사하게도 자기 집 수돗가에서 씻고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아직 반나절의 갈 길이 더 남아있고 그 남은 길에서 또 다시 진흙투성이가 되지 말란 법이 없었으므로 정중히 사양했다.

가로림만의 서쪽에 자리 잡은 청산리는 감태가 한창이었다. 마을 곳곳 볕이 잘 쬐는 곳에는 어김없이 감태 건조대가 있다.

감태는 갈파래과에 속하는 해조류로 이곳 충남 태안 외에 전남 무안, 신안 등 서남해안의 깨끗한 갯벌에서 난다. 쌉쌀하고 달콤한 맛에 향이 좋아 이름이 달짝지근한 이끼, ‘감태’(甘苔)다. 물에 젖어있을 때는 매생이와 흡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생이보다 더 밝은 연두색으로 거칠고 올이 굵다.

감태를 먹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발에 말려 김처럼 먹기도 하고 뭉터기로 말려뒀다가 척척 찢어서 파래처럼 무쳐먹는다.

감태김은 뜨거운 밥이나 구운 떡에 싸먹으면 최고의 궁합을 보인다. 특히 요즘처럼 제철에 말린 햇감태김은 적절히 쌉쌀한 맛에 해조류 특유의 상쾌한 갯내음이 강해 미식가들을 유혹한다.

70 평생을 감태를 뜯고 말리며 살아왔다는 유가운 할아버지 부부는 함께 감태김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감태를 흐르는 물에 여러 번 헹궈 조개껍질이나 뻘을 깨끗이 제거한 뒤 짚으로 엮은 발에 떠내 남향의 밭두렁 옆에 가지런히 세워두는 손길이 정성스럽다.

막 뜯어낸 생감태를 씹어보니 비닐봉지처럼 질기고 그다지 향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햇볕과 해풍에 마른 감태는 혀 위에서 녹아들며 놀라울 만큼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감태김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청산리에는 나그네들의 배를 채워줄 식당이 없다. 설사 식당이 있다 해도 일반 김값의 5∼6배를 호가하는 귀한 감태김을 찬으로 내주는 식당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청산리를 떠나며 뒷산 언덕배기에서 마을을 뒤돌아보자 따스한 봄볕 아래 감태김의 연초록 빛깔이 곱다. 감태의 색깔은 우주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의 초록빛을 닮아있었다.

이교산을 왼쪽에, 가로림만을 오른쪽에 두고 콘크리트 깔끔하게 포장된 해안길을 따라 부지런히 페달링을 하다보니 해안도로가 끊겼다.

# 박속밀국낙지탕 못 먹는 아쉬움…코숭어 젓갈로 달래다

위성지도로 확인해보니 우리의 위치는 원북면 마산리와 사창리 사이 가로림만의 가장 잘록한 부분으로 해안도로는 갯바위 지대에 막혀 여기서 끝이었고 산등성이에 구불구불 나있는 임도가 사창리까지 이어져 있다.

자전거를 들쳐 메고 끌고 해서 갯바위 지대를 통과할 수도 있겠으나 오전에 잠깐의 판단착오로 갯벌 수렁길에서 생고생을 한 뒤여서 선택에서 제외됐다.

사서 고생?이 맛에 산다!
사구로 유명한 신두리 해변에 설치된 자전거 식객팀의 임시 거처. 보통 텐트 없이 잠을 자지만 이번엔 지난달 혹독한 추위에 시달린 뒤여서 대형 텐트를 준비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반달같은 텐트의 모습이 제법 어울린다.


악몽의 뻘밭…이게 자전거야? 트랙터야?

봄바람에 취해 내려선 바닷길
갯벌은 자전거에게 지옥이었다
뻘에 박힌 바퀴 전진을 거부하고
달라붙는 진흙은 눈덩이처럼 커져
비지땀 한시간 반, 온몸 뻘투성이
길가의 할머니 “대체 뭣들 한겨?”


온 길을 3∼4km 되짚어 마산리까지 나간 뒤 603번 지방도로를 타는 것과 임도를 이용해 산을 넘는 두 가지 선택에서 자전거 식객들은 임도를 택했다.

겨울은 이미 떠날 채비를 하고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임도의 응달엔 아직도 곳곳에 잔설이 쌓여있고 골짜기 물길과 연결된 부분은 어김없이 빙판이다. 힘겨운 업힐 끝에 만난 내리막을 신나게 내려가던 정상욱 선배가 속도를 줄이지 못한 상황에서 길모퉁이를 돌자마자 갑자기 나타난 빙판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며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 외에는 임도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길에서 듣는 산새들의 쾌활한 지저귐은 오전의 생고생을 보상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임도 끝 지점의 사창리에서 만난 주민의 귀띔에 의하면 사창리의 옛 이름이 태포(笞浦)라고 한다. 청산리와 사창리가 태안에서 감태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이니만큼 태포는 감태의 포구라는 뜻일 게다.

1. 수렁같은 갯벌을 어렵사리 벗어난 뒤 사창리로 넘어가는 산길에서 다시 진창길을 만났다.얼음과 눈이 봄볕에 녹아 생겨난 웅덩이를 전속력으로 돌파했다.
2. 가로림만 갯벌을 빠져나온 뒤 진흙 투성이로 변한 자전거.
3. 바퀴에 진흙이 잔뜩 묻은채 내리막길을 고속으로 달리고 나자 엉덩이와 등이 온통 흙투성이다.


사창리에서 십리 남짓 거리인 이원면소재지에는 낙지로 끓이는 연포탕 중에서도 박을 썰어 넣어 끓이는 박속밀국낙지가 개발된 곳이다.

보통 연포탕은 무를 넣어 시원한 맛을 내는데 반해 박속밀국낙지탕은 무 대신 박을 썰어 넣은 것이다. 박속밀국에서 밀국이란 밀가루국수를 뜻하는 것으로 낙지를 건져먹은 뒤 칼국수를 넣어 마무리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2월의 서해에서는 낙지도 안 잡히고, 박속낙지탕의 핵심 재료인 박도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 굳이 먹자면 수입 낙지에 여름에 수확해 냉동해둔 박으로 만든 음식을 먹게 되는데 자전거 식객 여행을 시작할 때 제철 음식을 탐구하겠다는 원칙을 세운 터라 망설이던 차에 마침 특이한 간판을 발견했다.

‘미화식관’.

식당이 아니라 식관?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잘 삭은 젓갈냄새가 군침을 돌게 한다. 백반을 시켜 첫 술을 뜨는 순간 우리가 식당을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채 제거하지 않은 껍질이 있는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넣은 김치찌개와 토장국에서 내공이 느껴진다.

밥 먹기 전 냄새로 유혹했던 젓갈은 코숭어 젓갈이란다. 코숭어는 밴댕이보다 작은 생선으로 태안해역에서 소량이 잡힌다고 한다. 양념으로 버무린 코숭어 젓갈 속에는 어슷썰기로 토막 낸 매운 풋고추가 들어있어 입맛을 돋우었다.

식당 대신 쓰는 식관이라는 이름이 궁금해 주인 아주머니께 물었더니 오래 전 여관과 식당을 겸하던 시절에 쓰던 이름을 그대로 써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미화식관의 백반은 자전거 식객 여행을 시작한 이래 만난 백반집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맛도 있었고 넉넉했다.

미화식관에서의 식사로 기운을 차린 식객들이 이원면 당산리까지 북상했다가 603번, 634번 지방도를 가로지르며 서쪽으로 내달려 사구(모래언덕)로 유명한 신두리에 도착했을 때 뉘엿뉘엿 기울던 해는 서해로 잠겨들었다.

송철웅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사진|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moto1444@hanmail.net
“카드 전표 사인이었어?” 허영만 화백의 굴욕
입력 | 2011-03-02 07:00:00

 



허영만 화백을 발견한 팬들은 대부분 사인을 요청한다. 그럴 때면 허 화백은 자신의 작품 ‘사랑해’에 등장했던 강아지 ‘썰렁이’나 하트 모양의 그림과 함께 사인을 해주곤 한다. 스포츠동아 연재를 통해 자전거 전국일주 소식이 알려지면서 자전거를 타고갈 때도 허화백을 알아본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자전거 식객이 지나가는 길이 대부분 비교적 한적한 시골길이지만 때로 읍내나 면소재지를 지날 때면 파이팅을 외쳐주는 팬들도 있다.

그런 허화백이 자전거 여행 중 들른 한 식당에서 살짝 굴욕을 당했다. 식사비를 신용카드로 지불하자 주인이 카드전표에 사인을 하라는 뜻으로 필자에게 ‘사인해주세요’라고 말한 것. 식당 밖으로 나가는 찰나였던 허 화백은 예의 사인을 해달라는 뜻으로 알고 발길을 되돌려 주인 앞에 섰으나 주인은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 것이다. 주인과 허 화백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허 화백은 겸연쩍게 돌아서야했다. <삽화=허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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