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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 한국적 ‘가족 로망스’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10. 14.

캠핑, 한국적 ‘가족 로망스’ [2011.10.17 제881호]
[기획] 경제적 기반 다진 40대 가장들이 주도한 캠핑 열풍… ‘속물적 과시욕’, 위기의식 반영 등 해석 많지만 우선 즐겨볼 일
▣ 이세영 
   

» 지난 10월1일 오후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ㅅ오토캠핑장에 가족 단위 캠퍼들이 설치한 텐트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최근 2~3년 새 캠핑 인구가 빠르게 늘어 서울 근교 캠핑장의 주말 예약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노는 것 좋아하는 데는 이념이 따로 없다. 기계미학의 독특한 형식미를 빌려 노동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했던 페르낭 레제(1881~1955)도 말년엔 일하는 고통에서 해방된 미래의 유토피아를 형상화하는 데 정열을 쏟았다. 알려진 대로 그는 파블로 피카소 만큼이나 완고한 공산주의자였다.

» 페르낭 레제 <캠핑하는 사람>.
비용 저렴, 교육효과도 커

1950년대 대표작 <캠핑하는 사람>에는 웃통을 벗어젖힌 남자와 수영복 입은 여자, 공놀이를 하는 사내아이가 등장한다. 분위기로 미루어 도시 근교 휴양지로 놀러나온 노동자 가족이 주인공인데, 레제는 작품을 제작할 당시 1936년 여름에 단행된 ‘위대한 전환’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그의 조국 프랑스는 인민전선 정부의 주도로 주 40시간 노동제가 법제화돼 주말 연휴를 활용한 노동계급의 휴양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가족 단위 캠핑도 그중 하나였다.

60년 전 레제의 그림에 등장했던 ‘캠핑하는 사람’은 이제 국내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캠핑 인구는 최근 2~3년 새 가파르게 상승해 100만 명을 넘어섰다. 캠핑용품을 파는 시장 규모도 급속하게 커져 2009년 매출액이 처음으로 1천억원을 돌파한 뒤 지난해 2천억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3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캠핑용품 수입도 1년 새 64%가 늘어 물놀이 용품을 제치고 레저용품 가운데 수입 증가율 1위를 기록했다. 등산복과 신발 판매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웃도어 업체들도 속속 캠핑용품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LG패션의 라푸마가 올해 생산라인을 갖추고 시장 진입을 본격화했고, K2·블랙야크·노스페이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국내 캠핑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는 40대 남성들의 구실이 결정적이었다. 1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다진 40대 가장들이 가족 휴양의 방편으로 캠핑을 활용하게 되면서 동호인 수가 빠르게 늘어난 것이다. 박용철(41)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지난 6월 초등학생 아들의 학부모 모임에서 캠핑의 효능과 매력을 전해들었다. 콘도나 펜션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비용이 저렴하고, 아이들에 대한 교육 효과도 크다는 것이었다. 콘도 회원권이 있어 한 달에 한 번꼴로 주말 가족 여행을 다녀온 충실한 가장이었지만, 오고 갈 때마다 장거리 운전에 시달려야 했던 그로선 잦은 콘도 휴양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터였다.

인터넷 동호회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기초 정보를 수집한 뒤 6인용 텐트와 침낭, 캠핑용 스토브를 구입해 가까운 경기 파주의 사설 캠핑장으로 7월 초 첫 가족 캠핑을 갔다. 일단 이동 시간이 길지 않아 부담이 적었다. 문제는 캠핑장에 도착한 뒤에 벌어졌다. 장비 사용법이 서툴러 부부가 1시간 넘게 텐트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이웃 캠핑객의 도움을 받아 겨우 텐트 꼴을 갖췄다. “당신, 군대 갔다온 거 맞아?” 아내의 입이 한 자쯤 튀어나왔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들은 풍월은 있어 출발하기 전 고기와 화로를 준비했지만,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역시 친절한 이웃의 토치를 빌려 어렵사리 불을 지폈다. 고기를 구웠다. 직화 삼겹살을 맛본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우와” “아빠, 최고야!” 고기와 햇반으로 배를 채운 뒤 화덕 옆에 둘러앉았다. 곧 어둠이 깔렸다. 산속의 서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하늘에서 별이 쏟아졌다. 뾰로통하던 아내의 목소리 톤이 반옥타브쯤 올라갔다. “어머, 어머, 저 별들 좀 봐.” 아내는 어느새 연애 시절의 감성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그제야 펴졌다. ‘그래, 이 맛에 캠핑 오는구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불타오른 캠퍼의 끝없는 욕심

첫 캠핑을 다녀온 뒤 본격적으로 장비를 사들였다. 두 번째 캠핑을 떠날 때는 타프와 테이블, 캠핑 체어를 사들였다. 세 번째 캠핑 때는 코펠을 5인용으로 갈음했고, 더위를 타는 아이들을 위해 선풍기까지 큰맘 먹고 내질렀다. 목적지 역시 경관과 시설이 뛰어나다는 국립자연휴양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명산·중미산 등 수도권의 휴양림은 예약하는 게 로또 당첨만큼이나 어려웠다. 다행히 경남 함양의 지리산 휴양림에 빈자리가 났다. 4시간 넘게 운전대를 잡아야 했지만, 휴양림을 찾는다는 설렘에 피로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

3개월 새 6번의 캠핑을 다녀오는 동안 박씨는 어엿한 ‘캠퍼’(Camper)로 변신했다. 요즘은 동계 캠핑에 필요한 장비를 탐색하느라 틈만 나면 인터넷 공동구매 사이트를 기웃거린다. 리빙셸을 갖춘 일체형 겨울 텐트와 거위털 침낭, 화목 난로가 탐나지만, 문제는 돈이다. 그동안 장비 구입에 들인 돈이 300만원에 육박하는데, 불타오른 캠퍼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아이들은 지난번 캠핑 때 스크린을 걸고 휴대용 프로젝터를 쏘아가며 폼나게 영화를 감상하던 캠퍼들을 목격한 뒤 2주째 ‘영화 기계’ 타령이다. 눈 질끈 감고 질러버릴까? 고독한 결단의 시간이 임박했음을 그는 느낀다.

자동차로 캠핑 장비를 싣고 가는 오토캠핑용 캠핑장도 빠르게 늘고 있다. 2008년 83곳에 불과하던 전국의 오토캠핑장은 현재 500곳에 육박한다. 서울에만 한강난지캠핑장, 서울대공원캠핑장, 상암동 노을캠핑장, 중랑캠핑숲, 그린웨이가족캠핑장 5곳이 운영 중이며, 내년 봄에는 구로구 항동에 자연학습장을 겸한 수목원캠핑장이 문을 연다. 서울시는 북한산 사기막골과 시가 소유한 남양주 사능양묘장에도 캠핑장을 조성할 계획이다.

민간이 운영하는 사설 캠핑장의 증가세는 한층 가파르다. 경기 고양·양주·파주 등 서울 근교의 국도변은 요즘 야외 음식점을 캠핑장으로 전환하거나 주말농장에 새롭게 캠핑 사이트를 갖춘 복합형 캠핑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서울 진관동의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ㄷ캠핑장은 원래 등산객을 상대로 백숙이나 도토리묵 등을 팔던 음식점이었다. 지난해 10월 캠핑장으로 전환한 뒤 입소문을 타고 방문객이 늘더니 올해는 계절에 상관없이 주말 예약이 꽉 찬다. 일요일인 10월2일 아침 취재차 찾았을 때 캠핑장은 빽빽하게 들어찬 텐트와 차량들로 어지러운 난민 캠프를 연상시켰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왔다는 최종현(39)씨는 “어차피 해가 떨어지면 화롯불 앞에 모여 고기를 굽고 이야기를 나누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별 문제 없다”고 말했다. 고양시 행신동에서 온 박정철(42)씨는 “주말엔 서울 근교의 민간 캠핑장들 사정이 다 똑같다”며 “그나마 텐트 한 동 칠 자리라도 확보할 수 있어 감지덕지”라고 했다.

» 캠핑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한 데는 캠핑을 가족 단위 휴양의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40대 가장들의 구실이 결정적이었다. 자녀들을 위해 그릴에 고기와 소시지를 굽는 한 40대 가장.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자연 속에 집을 짓는 ‘공작적 성취감’

사람들은 왜 캠핑에 열광하는가. 애호가들은 “콘도·펜션 숙박이 제공하지 못하는 색다른 체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파트 생활의 연장인 콘도나 고급 민박에 가까운 펜션과 달리, 실내·외를 가르는 게 얇은 섬유막뿐인 텐트 숙박은 자연과 몸의 거리를 최대한 밀착시켜주기 때문에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기엔 최적이라는 것이다. 캠핑 마니아인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캠핑을 ‘사람이 집을 갖고 다니는 유일한 행위’라고 정의한다. “비록 문명 속에서 돈을 주고 구입한 장비들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자연 속에서 집을 짓고 나무를 줍고 직접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거나 평생 해볼 수 없는 일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는 이것을 ‘공작적(工作的) 성취감’이나 ‘중산층 중년 남성의 속물적 과시욕’과 연결짓는다. 제공된 서비스를 향유하는 콘도나 펜션에서의 여가와 달리 캠핑은 장비 마련부터 손질·적재·설치·철거까지 자신의 힘과 경험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행위자에게 굉장한 성취감을 안겨줄 뿐 아니라 안정된 지위와 경제력, 남보다 우월한 육체적·지적·심미적 능력을 드러낼 최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한국 남성들의 고양된 가족주의를 캠핑 열풍의 진원지로 지목하기도 한다. 실제 대부분의 캠핑 동호인들은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점을 캠핑 활동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데, 캠핑이 산을 오르거나(등산), 물고기를 낚거나(낚시), 정해진 구멍에 공을 집어넣는(골프) 식의 정해진 목적을 갖기보다,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특별한 체력이나 기술, 지식 없이도 얼마든지 즐거움을 공유하는 게 캠핑에선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캠핑 열기를 떠받치는 가족주의가 한국 중산층 가계의 심화된 위기의식을 반영한다는 진단도 있다. 문화평론가 정윤수씨는 한국의 40대 남성을 위협하는 두 가지 공포에 주목한다. 실직과 건강 이상에 대한 두려움이다. 현실화될 경우 곧장 가족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위협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공포를 우회하려는 노력은 한층 필사적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40대의 캠핑 몰입을 “텐트를 치고, 장작을 때고, 고기를 구워 아내와 자식들 밥그릇에 놓아주면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으려는 절박한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말한다.

쾌락과 치유의 공간

이렇듯 캠핑은 ‘쾌락과 과시’의 수단이자 ‘치유와 위안’의 공간이란 이중성을 갖는다. 21세기 ‘가족 로망스’의 한국적 형식으로 부상할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밥벌이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 한, 가족 제도를 대체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성공적으로 안출하지 못하는 한, 캠핑이란 여가 형식에 구현된 쾌락과 구원의 판타지는 매체와 형식을 갈아타며 지속될 것이란 점이다. 그러니 도덕적 부채감 따위는 맘 편히 내려놓고 우선은 즐겨볼 일이다. 공산당원 레제가 그린, 웃통을 벗어젖힌 캠핑장의 구릿빛 그 사내처럼.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