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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국민연금!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2. 4. 10.

아버지의 유산, 국민연금!
2011년 청소년 글짓기 중등부 최우수상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아버지의 부재를 절실히 느꼈었다. 특히, 아침에 멀쩡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는 오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 날이면 교문은 마치 농산물을 경매를 하는 새벽시장처럼 아수라장이 된다. 하지만 경매시장이 늘 그렇듯, 교문을 사이에 두고 빵빵거리는 차들 속으로 친구들은 하나 둘 사라진다. 가끔 차의 윈도우가 내려가면 나도 모르게 힐끔 얼굴을 돌리게 되고 그러면 또 늘, 내가 몇 반인지 묻는 아저씨들을 만난다. 하긴, 때론 친구의 엄마들을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저씨들이었다. 텁석부리 아저씨든, 막 논에서 포터를 끌고 온 진흙투성이 아저씨든, 비오는 날에 교문으로 찾아오는 아저씨들은 너무나 듬직해서 나를 슬프게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나는 비를 흠뻑 맞고 집으로 돌아가 방문을 꽝 닫아버렸었다. 오빠와 나를 위해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는 엄마에게는 시간도 차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요즘도 비가 와 학교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방문을 잠그고 ‘너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난거니?’ 스스로 묻는다. 그럴 때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처럼 ‘나도 아빠가 있었으면’하는 마음 속 투정은 중3인 내게는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 픽 웃어 버린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비가오던 그 어느 날 이후로 엄마와 나 사이에 생긴, 무언의 금기같이 되어버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투정은 슬그머니 엄마에 대한 미안함으로 바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장이 안 좋아지셨다는 엄마는 산에도 다니고 꾸준히 운동을 하지만 하루에 내가 먹는 밥 한 끼 정도 밖에 못 드신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점점 말라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미움으로 바뀐다. 아니, 매달 내 통장에 찍히는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미움의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올해, 오빠는 서울의 사립대를 포기하고 지방의 수학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벌써 작년의 일이 되었지만 지방 국립대에만 원서를 넣는 오빠의 고집을 엄마는 꺾지 못했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가장처럼 자라서인지 오빠는 무척 현실적인 성격이다. 고등학교에 진학 할 때도 청주로 가라는 엄마의 말씀을 듣지 않고 집에서 가까운, 그리고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진학을 했다. 나와 달리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언제나 가장 안정적인 길을 택하는 오빠. 그런 오빠의 대학 진학을 설득하기 위해 엄마가 내놓은 것이 통장이었다.
‘너와 윤아의 대학 등록금은 다 마련되어있다.’고 설득을 하며 내놓은 오빠의 통장에는 천만 원이 조금 넘는 액수의 숫자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도 꼭 그만큼의 숫자가 찍혀있었다.

“작은 돈 같지만 네가 2년 동안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윤아도 3년 후에 대학을 가니까……. 또, 너희들이 받아왔던 장학금 통장도 따로 있고. 부족하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진학해도 그렇게 막막한 건 아니야.”

그 때, 엄마의 간절한 설득에도 오빠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한 번도 운적 없는 그 작은 눈에 이슬이 걸려있었다. 아마, 평소의 오빠였다면 그 좋은 머리로 서울의 사립대 등록금이 얼마이고 4년을 다니려면 또 얼마가 필요한데, 그 돈으로는 턱도 없다고 반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기숙사에서 나온 오빠는 정말 아무 말 없이 통장을 들여다보다 다시 학교로 갔다.

어쩌면 미움과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나와 오빠의 이 감정은 매달 통장에 찍히는 오 만원 조금 넘는 그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장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나는 매달 한 번 통장을 보며 그리운 아버지를 만난다. 그리고 엄마 앞으로 나오는 십일 만원 조금 넘는 국민연금, 그 유족연금을 15년 넘게 나와 오빠의 통장에 쪼개서 넣어주고 계시는 엄마의 깡마른 모습을 볼 때마다 미운 아버지를 만난다.

생각해보면 사진으로 밖에 추억할 수밖에 없던 아버지의 몫까지 챙겨주려, 엄마는 오빠와 나에게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는 짧지만 꼭 방학 때마다 가족여행을 갔고 중학교 때는 힘이 들 줄 뻔히 알면서도 성적 때문에 투정을 부리면 꼭 단과학원이라도 보내줬다.
그런 엄마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오빠와 나는, 비록 시골의 학교이지만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으로 살아왔다. 오빠도 나도 성적 장학금을 받아오면 어깨를 으쓱 거리며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증서와 봉투를 내밀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작은 돈마저 차곡차곡 쌓아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 주고 계신다. 점점 말라가는 엄마의 미래에는 어떤 준비도 없이.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 국민연금을 자세히 알기 전까지는 미운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는 원망스러운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방학을 먼저 시작한 오빠는 하루 12시간을 일한다. 낮에는 오창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농작물을 관리하고 밤에는 집 근처의 편의점에서 일을 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본다. 내가 ‘오빠 장학금 탄다며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해’하고 물으면 ‘학교 생활비, 그리고 학기 중에는 공부를 해야 하잖아.’하고 시치미를 떼지만 나는 오빠가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써버린 아버지의 유산을 다시 원래대로 채워 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그건 엄마 돈이야, 아빠가 엄마에게 주신…….’ 수능이 끝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오빠의 입에서 나왔던 말, 자신이 한 말을 내가 잊어버린 줄 안다. 하지만 난 오빠보다 더 괜찮은, 썩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엄마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엄마를 보살펴드리고 같이 있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늘 그랬듯이 엄마는 또 혼자서 모든 일을 해 내셔야만 한다. 오빠가 늘 장학금을 탈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러면 또 아버지의 유산을 쓰지 않겠다는 오빠의 고집에 오빠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는 집에서 더 많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주로 나가라는 엄마의 말에도 오빠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진학할 계획이다. 지금의 성적을 유지한다면 오빠처럼 기숙사비나 학비는 모두 학교에서 지원받는다. 하지만 나의 근사한 계획은 이것만은 아니다.

“엄마는 국민연금 내?”
“아니”
“왜 안 내?”
“그럴 돈이 있으면 너희들 저금이나 더 해주지.”
“그래도 나중에 엄마 돈 벌기 힘들 때 되면 국가에서 돌려주잖아. 우리 통장으로 엄마가 넣어주는 아빠 국민연금처럼. 또, 아빠는 얼마 안 넣었는데도 더 받잖아.”
“커서 엄마한테 용돈도 안 줄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나도 결혼하고 아기 낳으면 엄마를 자주 못 보니까 하는 말이지. 지금도 우리 외할머니 댁에 자주 못가잖아.”
“엄마가 다 알아서 할게.”

기말고사가 끝나고 8시 뉴스를 보던 나는 문득 아버지의 유산, 내 통장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국민연금이 떠올랐다. 나는 공부방 아이들을 배웅해 주고 오는 엄마에게 국민연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국민연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국민연금이 엄마가 오십 살 때까지 들어오면 끝이라는 이야기.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더 길다는 이야기를 조금씩 해 갔다. 그러면 엄마는 ‘저축은행 봐라. 망하면 하나도 못 찾는 거야’, 하고 관심 없다는 듯설거지를 했다. 나는 엄마가 ‘국민연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잘못된 정보라도 봤나 생각하면서도, ‘엄마, 국가가 망하는 거 봤어? 요즘은 텔레비전만 틀면 보험광고 나오잖아. 하지만 보험회사는 망해도 국가는 안 망해’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를 설득하는데 가장 좋은 자료들은 국민연금관리공단 홈페이지의 ‘뉴스홈’에 있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엄마도 텔레비전과 신문의 뉴스는 신뢰했다. 그리고 지난 주 월요일에는 공부방 방학을 틈 타 엄마를 컴퓨터 앞에 붙잡고 있을 수 있었다. 먼저 지난 번 본, 8시 뉴스의 동영상을 먼저 보여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족연금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남긴 것이고 장애연금은 우리가족은 장애가 없으니까 별로 상관이 없는 듯 하고 노령연금…… 노령연금은 엄마를 위한 거다. 그치?”
나는 처음 보는 척 연기를 했다. 그런데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근데, 엄마도 들 수 있나?”
“잠시만. 가입기간이 10년 이상이 되어야하고 60세 이상부터 연금을 받으니까, 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까 뉴스. 여기 이 뉴스 봐. 일을 안 하는 전업주부도 가입되는데 엄마가 왜 안 돼.”
나는 엄마가 가입을 늦출까봐 연금 수령시기를 늦추고 10년을 채우는 방법도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우스를 내리던 내게 엄마는 ‘아 잠깐만, 군복무 크리딧. 저건 뭐냐?’하고 물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갈 오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엄마의 마음을 돌렸다.
내가 여름방학 방과후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학교에 다녀오는 오전에 ‘군복무 크리딧’제도를 찾으며 엄마는 홈페이지에서 이것저것 보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는 ‘1355’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콜센타에 전화를 했다는 말을 하셨다.

“19세부터 가입할 수 있다니까 오빠 꺼하고 같이 들려고.”

‘그럼 나는?’하고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어쩌면 아버지가 보내주신 국민연금, 그 유산이야말로 우리 가족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은 돈이지만 아버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산, 그것은 앞으로 엄마를 잘 부탁한다는 아빠의 신호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국민연금을 가입하게 되면 이제 엄마는 나도 오빠도 그리고 든든한 국가도 있으니 혼자가 아니다. 나와 오빠가 통장을 보며 항상 아버지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듯 이제 엄마도 국민연금 속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운, 그리고 밉고 원망스럽던 아버지. 엄마가 15년 넘게 우리를 위해 쌓아 놓으신 아버지의 유산은 , 우리 가족의 밝은 미래 국민연금으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