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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의 명사산행] 한국 바둑의 영원한 국수 조훈현 9단

by 시리우스 하우스 2011. 5. 4.

[엄홍길의 명사산행] 한국 바둑의 영원한 국수 조훈현 9단
“승부의 길은 결국 내 안에 있다”

 “대장님이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죠. 졸개가 대장님 말을 따라야죠. 하하하!”


서글서글한 인상, 시원한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제비, 바둑황제, 전신(戰神), 국수(國手)라는 별명을 가진 조훈현(58) 9단이다. ‘제비’란 바둑 행마의 날쎈 기풍 때문이고, 전신(戰神)은 상대의 혼을 빼놓기 때문이며 바둑황제는 세계대회 우승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 붙여서 가장 많이 불리는 호칭이 국수(國手)다. 국수란 국수전 타이틀을 가졌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며 나라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창호나 이세돌 처럼 젊은 기사들에게 최강자의 자리는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바둑계에선 존경과 애정을 담아 조훈현 국수라고 부른다.


▲ 산악계와 바둑계의 진정한 고수가 만났다. 산행 초반 엄홍길 대장이 조훈현 국수의 재킷 매무새를 바로잡아 주고 있다.

반상의 고수와 산의 고수가 만난 곳은 조훈현씨의 집이 있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북한산 입구다. 3월의 봄비가 내리는 와중에 두 고수는 아랑곳없이 산으로 든다. 첫 만남이지만 둘의 대화는 막힘이 없다. 엄 대장이 먼저 말을 붙인다. 


 “평창동은 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동네인데요. 언제부터 사셨나요?”


 “여기 산 지 20년쯤 됐군요. 아파트보다는 주택이 더 좋더라고요. 저는 아파트를 싫어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도봉산 원도봉 자락에서 40년을 살았어요. 그러다 땅이 국립공원으로 편입되면서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아휴 도저히 못 살겠더라고요. 불편한 거예요. 여기서 더 살다간 내가 죽겠다. 못 살겠다. 해서 가족들 데리고 무조건 다시 산동네로 이사한 거예요.” 


 “저택이든 초가집이든 상관없는데 나는 땅이 있어야 되요. 흙이 있는 게 좋아요. 애 엄마도 꽃 심는 걸 좋아하고요.”


 조 국수는 “요즘은 산에 자주 못 가지만,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갔다”고 한다.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등산을 자주 다녔다. 기원에 열심히 산에 가는 분이 있었는데 그가 일요일 아침에는 항상 종로3가에서 같이 산에 갈 사람을 기다렸다. 그러면 등산 가고픈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 3명이든 8명이든 산에 갔었다고 회상한다.


▲ 쉬는 동안 조훈현 국수가 보온병의 차를 엄 대장에게 권한다.

한번은 바둑행사가 있어서 월출산 인근에 갔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밤을 새우게 되었다. 등산 계획은 예정에 없었는데, 당시 산타는 걸 좋아해서 아직 눈도 안 녹았을 때인 3월의 새벽 5시에, 구두 신고 코트 입고 산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조 국수는 눈 쌓인 겨울산을 가장 좋아하는데, 올해 초에 북한산에서 미끄러져 2주일을 고생했다고 한다. 산을 잘 안 간다는 그이지만 “집이 산 아래라서 종주는 아니더라도 2~3시간 간단하게 한 바퀴 도는 건 즐긴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산을 즐긴 연륜답게 가벼운 산행은 그저 산책으로 여기는 조 국수다. 


 “산행은 누구와 같이 하나요?”


 “거의 혼자 가죠.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아서 가파른 길에선 1분 걷고 10분 쉬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일행하고 맞추기가 힘드니까 혼자 가게 되는 거죠. 체면이 있으니 바로 쉬자고 하기도 힘들고 혼자 가는 게 편해요.”


 엄홍길 대장이 “그래도 걸음이 빠른 편”이라고 하자, 조 국수는 별명이 ‘제비’가 된 사연을 설명한다.


 “성질이 급해서 그래요. 제비도 원래 산에서 생긴 별명이에요. 그 때 1년에 한두 번씩은 며칠씩 날 잡아서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바둑선배들이랑 갔거든요. 지리산 산행할 때 같이 간 선배가 저보고 날렵하게 제비처럼 산을 잘 탄다 해서 제비 같다고 했어요. 산에서 내려와서도 제비라고 불렀는데, 다른 사람들은 제비처럼 바둑이 날쌔다, 발 빠른 바둑이다 해서 별명으로 굳어졌죠.”


 그의 바둑은 물찬 제비처럼 빠르게 맥점을 짚어 실리를 취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약간 바뀌었다. 


 “산행도 그렇지만, 예전엔 빠른 게 통했지만 이제는 창호한테도 빠른 게 안 통하니까, 싸움 바둑처럼 변했죠. 물론 본질은 변한 게 아니지만요. 옛날에는 싸움을 잘 안 했어요. 도마뱀처럼 꼬리만 떼 주고 골인지점에 발 빠르게 갔는데 이제는 꼬리가 아니라 몸통까지 잘려서 골인하기 전에 죽으니까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약간 변하고 있죠. 산행도 나이 들면 예전 속도가 안 나잖아요. 그런 식으로 바둑도 왕년에 몇십 수 앞을 한눈에 봤는데, 지금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수가 안 보이니까요.”


▲ 북한산 대성문에서 조 국수와 엄 대장이 과일을 먹으며 한 숨 돌린다. 산과 바둑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의 만남이지만 어색하지 않다.

김근원 산사진가와 함께 설악산 누벼
 조 국수는 젊을 적 지금은 고인이 된 산악사진작가 김근원씨와 함께 산을 다니곤 했다. 바둑과 등산을 좋아했던 고 안창근씨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안 대장이라고 기원에 산 좋아하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산 좋아하는 기사들을 끌어들인 거예요. 설악산 유창서씨도 그래서 알게 됐죠. 그때 김근원 선생님과도 같이 산에 다녔어요. 지리산 산장 함태식씨도 만나고요. 처음 지리산 갔을 땐 엄한 분이었는데, 저희한테 잘해 주셨죠. 산장에선 흡연구역을 만들어 특별히 담배 피우는 혜택도 주시고, 하하하! 그런 기억들이 많죠. 엊그제 같은데 이젠 추억 얘기만 하고 있네요.”   


 조 국수는 김근원씨의 카메라 장비를 들고 산행한 적도 있고 신혼 초에 부인과 함께 설악산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초였죠. 자그마하신 분이 카메라와 장비 들고 어찌나 잘 다니는지. 그런데 어느 날 무릎을 다치셨어요. 아프시니까 할 수 없이 내가 30대 초라서 제일 팔팔했으니까 카메라 메고 따라갔어요. 처음 드니까 무겁더라고요. 거기까진 괜찮았어요. 경치 좋은 데 나오면 김 선생님을 기다려야 되는데, 일행들은 안 보이는 데까지 올라가 있고, 일행 따라가야지, 김근원 선생 따라가야지. 혼쭐났죠. 한번은 갑자기 비가 오는데 장비가 비 맞는다며 산장에서 보자고 그러면서 뛰어가는데, 번개가 따로 없어요. 어찌나 빠르신지, 금방 안 보여.”


 엄 대장이 “예전에는 산 많이 다니셨군요”하고 묻자 이제야 산행 경력을 풀어 놓는 조훈현 기사다. 


 “지금은 동네 뒷산밖에 안 가지만 예전에 다녔죠. 겨울에 지리산도 가고, 설악은 용아장성하고 공룡능선이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갔어요. 산악인이 아니면 가기 힘든 시절이었죠. 그거 만만찮더라고요.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 해요. 그땐 제가 산을 좋아해서 할 건 다 했어요. 아내도 산에 데리고 갔으니까요.” 


 산에서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었는데 산에 갈 때면 “소고기 한 근, 돼지고기 한 근 사가지고 점심 때 되면 돌 찾아서 밥 해 먹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취사가 가능했다. 술은 알레르기가 있어서 전혀 못 한다고 한다. 한 잔 마시고 쓰러진 것만 세 번이었다. 다른 음식은 대체로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


 “술을 못 하는 게 바둑 두는 데 도움이 됐겠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리 됐죠. 술이라는 게 적당히 마시면 좋은데 절제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당시엔 술 좋아하는 기사들이 많았죠. 요즘 젊은 기사들은 술을 마시긴 하는데 많이 마시진 않아요. 우리 땐 상금 타면 일단 쓰고 봤는데, 요즘 애들은 한푼 한푼 다 계산하더라고요. 계산도 각자 하고요.”


▲ 3월 20일, 북한산 능선엔 눈이 내린다. 난감하지만 이 또한 산행의 묘미다. 두 고수가 봄날의 설경을 즐기고 있다.

“서봉수와 라이벌 아니야. 49대 51의 승부가 나야 라이벌”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9단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유명하다. 흔들림 없이 두터운 바둑으로 세계바둑을 평정했던 이창호는 부진으로 22년 만에 타이틀 없는 무관이 되었다. 스승으로서 어떻게 보는지 엄 대장이 물었다.


 “본인 탓이죠. 체력에서 오는 건지, 공부를 안 해서 오는 건지, 그건 몰라요. 몸이 안 좋다는 얘기도 있는데, 정확한 건 몰라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후배들이 세진 거죠. 내가 몸이 안 좋더라도 밑에 사람이 못 하면, 쉽게 얘기해서 눈 감고도 이기거든요. 후배들이 세지니까 눈 뜨고도 지죠. 그런 거는 다른 사람이 못 도와주죠. 본인에게 달린 거죠. 체력 보완이든 공부든 자기 스스로의 싸움이죠. 제가 스승이라 해서 뭐라 해줄 순 없어요.” 


 조훈현 국수는 “요즈음 바둑도 못 이기고 대국이 적으니 시간이 많이 난다”고 얘기하지만, 지난 12월 대주배 프로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우승했다. 대주배는 50세 이상의 기사들이 승부를 겨루는 대회다. 


 “그나마 그거라도 위안이 되는 거죠. 비슷한 나이에서는 선두를 유지하는 거지. 승부는 나이를 떠나서 정상을 따져야 하는 거니까요. 왕년에 신기록 냈으면 뭐해요. 지금 잘해야죠.”
 대주배 결승에서 그는 서봉수 9단을 맞아 2대 0으로 승리했다. 서봉수와 그를 두고 라이벌 관계라는 얘기는 매스컴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조 국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건 남들 얘기고, 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한참 정상에 있을 때는 자신과의 싸움이고 자신이 라이벌이죠. 꼭 찍어서 누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라이벌이라는 건 100번 두면 49대 51 같은 승부가 나야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승패가 너무 차이가 나면 라이벌이라 할 수 없는 거죠. 단지 1등과 2등이라고 해서 라이벌이라고 하는 건 인정 못 해요.”


 슬럼프일 때는 어떻게 해결책을 찾는지 묻자, 주저 없이 “산행과 여행”이라 답한다. 


 “질 때는 모든 사이클이 나빠요. 원인은 몰라요. 하지만 못 하는 원인은 분명 있어요. 정신력이나 체력, 사생활에 문제가 분명 있을 거예요. 좋은 사이클을 빨리 되찾아야죠. 그럴 땐 산에 와야 해요. 여행 같은 걸 하면서 기분전환을 해야죠. 산에 가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로운 맘으로 좋은 사이클을 빨리 되찾는 게 나름의 방법입니다.”


▲ 형제봉 줄기의 훤한 바위와 두 달인의 호탕한 웃음이 그림처럼 잘어울린다.

 조훈현은 등산이 바둑에 있어 도움이 된다고 본다. 산행은 힘들지만 “힘들 때 산이 뭔가 가르쳐 준다”고 한다. 


 “바둑 기사로 어느 정도 고수가 되면 더 공부해서 기술력으로 해결하긴 힘들죠. 지금 공부한다고 해서 신기술을 개발할 수는 없거든요. 물론 공부는 하지만 상태를 점검하는 정도죠. 오히려 체력이나 정신적인 문제가 많이 와요. 그걸 고친다고 하는 게 맞겠죠.”


 “아이고 대장님 반갑습니다. 사진 한 장 같이 찍으시죠.”


 “와 엄홍길 대장님이네.”


능선에 가까워지자 등산객들이 늘어나며 인사를 한다. 반상의 최고수도 산에서는 엄 대장의 인기를 따라잡진 못한다. 조 국수는 “기원에 가면 저도 이 정도 환영은 받는다”며 유쾌한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는다. 


 엄홍길 대장이 등산이 바둑에 도움이 되는지 묻는다. 조훈현 국수는 바둑과 등산은 자기와의 싸움임을 강조한다. 힘든 걸 극복하며 오르는 자기와의 싸움이며 점점 올라갈수록 경치가 좋아지듯 실력도 향상되는 것이라 한다. 어떤 기사들은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냐고 묻지만, 산을 오를 때의 과정을 즐기는 것은 어찌 설명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자기가 직접 땀 흘리며 산을 오르고 느껴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 바둑과 등산은 맥이 닿은 부분이 있다고 한다. 대장과 국수는 경지에 닿은 이들의 화법을 구사한다.


 “저는 산을 수직으로 이동하고 국수님은 바둑을 두시니 수평으로 이동하는군요. 저희는 수직과 수평의 만남이군요. 하하!”


 “수직과 수평이면서 결국 다 똑 같습니다. 과정은 다르지만 정상은 하나니까. 어느 길을 가든 만나게 되어 있고 정점으로 통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 1980년대 초 결혼 직후 부인과 함께 한 설악산 산행. 함께 산행했던 김근원 선생이 찍었다.

바둑은 내게 그저 가는 길이다
 조훈현은 네 살 때부터 바둑을 두었다. 네 살 때 아홉 점을 놓고 7급인 아버지를 이겼으며 아홉 살에 프로바둑 기사가 되었다. 열 살에 일본에 바둑유학을 갔고 당시 바둑이 한국보다 강했던 일본에서도 3년 만에 프로가 되었다. 네 살에 시작했으니 54년을 반상 앞에 앉았고, 최다승 기록을 지금도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야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지는 건 싫어하게 마련이고 이기면 기쁘다”고 낮춰 말한다. 


 형제봉 능선을 지나 대성문에 닿자 예상치 않게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능선엔 언제부터 눈이 내렸는지 한겨울 풍경을 하고 있다. 3월 중순 내리는 눈이라, 두 고수도 놀라워한다. 북한산이 두 고수를 환영하는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는 게 좋을 성 싶다. 대성문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봄눈을 구경한다. 호흡이 고른 틈을 타 무거운 얘기를 꺼낸다. 조 국수에게 바둑은 어떤 의미인지, 엄 대장에게 산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바둑이고, 나는 바둑을 통해서 걸어왔어요. ‘바둑이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바둑이 아니라도 뭐는 뭐다 정의를 내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 길을 택했으면 그 길을 가는 거죠. 나도 바둑이 뭐냐고 했을 땐 답이 없어요.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바둑은 제게 그저 가는 길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산은 제 삶에 있어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나침반처럼 길을 알려주죠.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을 되돌아보면서 겸손함이나 사람됨을 배우게 합니다. 히말라야 높은 산일수록 그런 게 더 크죠. 생과 사를 오가는 경험을 더 많이 겪게 되니까요. 여러 상황을 겪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이것 보세요. 바둑에서 몇 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것처럼 산에서의 날씨도 예측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낮은 산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이렇게 변하는 걸 보세요.”


말이 나온 김에 바둑의 달인인 조훈현은 과연 몇 수 앞까지 내다보는지 엄 대장이 물었다. 


 “숫자상으로는 50수 100수를 봐요. 간단한 거는 그렇게 보죠. 그런데 산에서 갈래길이 나오면 우측이냐 좌측이냐, 가긴 가야 되는데 어느 쪽이 편하고 좋은 길이냐는 건 가늠하기 어렵잖아요. 바둑도 큰 데를 둬야 하는데 우측이냐 좌측이냐 그건 모른다는 거죠. 두세 가지가 좋은 길이다, 이건 보여요. 이거 놓고 어디가 더 좋은 길이다, 그건 몰라요. 이게 정답이라고, 이거 밖에 없어 하고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보면 아직 한 수도 못 보는 거예요. 대장님도 등반할 때 날씨에 따라 루트가 바뀔 수 있듯이 바둑도 가다보면 변화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몇 수까지 그런 건 답이 없어요. 한 수도 못 볼 수 있는 거죠.” 


 “맞습니다. 등반도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경험을 통해 판단하는 거죠. 눈사태가 날 것 같다,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걸 처음에는 판단 못 했는데, 사고도 나고 실패도 겪고 여러 경험을 하면서 예측할 수 있게 되죠. 저기 분명히 눈사태가 난다. 며칠은 날씨가 안 좋을 거다 하는 거죠. 국수님 말씀대로 수가 보이게 되는 거죠.”


간식도 먹고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다 보니 춥다. 땀을 내려 산을 내려간다. 봄산에서 설산이 된 길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내리막에서 발에 힘이 들어간다. 앉아서 하는 바둑도 체력 소모가 크다고 조 국수는 말한다. 과거에는 오전 10시에 대국을 시작해 밤 10~12시까지 둘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대국을 2~3일에 한 번씩 하니 집에 오면 완전 녹초가 된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컨디션이 안 좋을 땐, 해결책을 산행에서 찾는다. 산행을 평소보다 약간 세게 한단다. 한 시간 할 거 두 시간 하는 식으로 평소보다 거리를 늘려 몸을 살짝 지치게 한다. 그렇게 하고 집에서 샤워하면 그렇게 잠이 잘 온단다. 자고 일어나면 “찌뿌둥하던 몸이 개운해진다”고 한다. 마침 집 얘기가 나와 집에서도 국수 대접을 받는지 물었다.


 “백전백패예요. 안 사람에게 1승하는 게 목표인데 영원히 이뤄질 것 같지 않아요.”


▲ 숱한 고비를 넘긴 무서운 승부사들이지만 반상과 고산을 떠나면 더 없이 환한 미소로 사람을 맞는다.

적벽대전이라 불린 응창기배 대역전승
 “제가 가장 힘들었던 등반은 안나푸르나에서 발목을 다쳤을 땐데요. 그래서인지 기억에 남는 산이 되었습니다. 국수님도 기억에 남는 대국이 있으신가요?”


 조 9단은 기억에 남는 대국으로 제1회 응창기배 결승전을 꼽았다. 당시 철의 수문장이라 불렸던 섭위평과 결승에서 만났다. 세계대회로는 처음 열린 대회여서 한·중·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느 나라 기사가 처음 우승하느냐에 세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당시 조훈현은 2대1로 불리하던 상황을 극적으로 3대2로 뒤집어 적벽대전에 비유되는 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는 바둑황제로 불리게 되었다.


 “2대1로 제가 불리한 입장이었거든요. 4국째 들어가는데 상대의 표정이 굳어 있더라고요. 희망이 있다 생각했는데 반집 차이로 이긴 거예요. 이제 운명의 5국인데 4국을 둘 때보다 상대가 더 굳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바둑이 잘 풀렸어요. 근데 이겼다 생각하는 순간부터 바둑이 안 되더라고요. 우승이다 생각하니까 손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큰 일 난 거죠. 바둑이 혼전이 됐는데 상대방이 계속 밀어붙였어요. 계가로 안 가고 싸움을 해서 KO 펀치를 던지려고 쳐들어왔는데 무리수를 둔거예요. 그 때 마침 묘수가 있어 이기게 된 거죠. 제가 그때 졌으면 아마 한국바둑과 중국바둑의 기계가 틀려졌을 수도 있어요. 그 한 판은 바둑계에서는 약간 영향이 있었던 한 판이었어요.”


 얘기를 들은 엄 대장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런 심리를 읽을 수 있냐고 물었다. 조 9단은 바둑을 안 보더라도 불리한 사람의 얼굴은 벌개져서 표시가 난다고 한다. 바둑이 유리하면 아무래도 웃게 되고 얼굴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국수님은 불리할 때 어떤 식으로 표시가 나나요?”


 “엄살이라고 그러죠. ‘망했네’ 그런 소리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는 그런 표현을 많이 하는 편이죠.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나도 모르게 나와요. 대장님은 등반에서 안 좋은 상황일 때 어떤가요?”


 “저는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에요. 속으로는 안 좋더라도 겉으로는 ‘괜찮아 잘되고 있어’, 하고 대원들에게 말해요. 속으로는 등반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장고를 하는 거죠.”
엄홍길은 현역 등반가에서 물러나 휴먼재단을 통해 다른 도전을 하고 있다. 조 국수에게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 물었다. 


▲ 산행을 마치고 서로의 책을 주고 받는 국수와 대장. 조 9단은 지난해 초보자를 위한 바둑입문서를 냈다.

 “솔직히 얘기해서 저도 정상을 뛰어 오르는 시기는 지났어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시기가 온 거죠. 이제는 바둑 보급을 하려고 합니다. 전에는 정상에 올라야 했는데 이제는 오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다음에 올라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줄 것들이 있고 그런 것 위주로 도와주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럼 이창호 같은 제자를 다시 키우고픈 생각은 없으신지요?”


 “인연이란 게 쉽지 않아요. 바둑을 잘 둘 수는 있지만 세계1등은 쉽지 않아요. 그런 재주가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아요. 만나더라도 키워야 되는데 바둑 수를 전수하기보다는 인성 같은 것을 전수해 줘야 하거든요. 어찌 보면 자식을 키우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내 새끼도 키우기 힘든 세상인데 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세요. 부모가 어린 자식을 멀리 떨어져 보내는 것도 어렵고 쉽지 않아요. 세계적으로 통하는 그런 기사가 되느냐, 그런 것도 문제고요. 대장님은 좋은 산악인이 되는 데 어떤 자질이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어차피 기술은 가르치면 되기 때문에 마음, 인성이 중요하다고 봐요. 정신적인 부분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 됨됨이가 정말 중요해요. 대원들을 선발할 때도 그런 부분을 더 우선적으로 보고요. 왜냐하면 산을 올라가는 것 자체가 좋은 여건에서 등반하는 게 아니니까. 오를수록 상황은 어렵고 위험해지고 극한 상황을 맞게 되니까. 그런 극한 상황에 가서는 아무리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희생정신, 믿음과 동료애가 필요한 거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 어렵죠. 그래서 저는 사람의 됨됨이를 먼저 봅니다.”


“제가 어릴 때 일본에 바둑 공부를 하러 갔을 때 최고수가 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그 때 말씀이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이 먼저 되고 국수가 돼야지. 국수가 되고 나서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인성, 인품,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하셨죠. 가만히 따져보니까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도 갖추기 힘들어요. 살아오면서 느낀 거지만 사실 사람이 노력만 할 뿐이지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기는 어려워요.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고 봐요. 사람 됨됨이가 제가 봐도 첫 번째인 것 같아요.”


평창계곡으로 산을 빠져나온다. 산악계와 바둑계의 두 거목이 나누는 묵직한 얘기 때문인지 숲의 깊이가 올라갈 때와 다르다. 한 수 앞을 모르는 승부의 길은 결국 나 자신 안에 있다는 국수의 말 속에 아직 뜨거운 무언가가 전해 온다. 


 /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경민 기자